“성능 차이가 확실하니까 TSMC에 맡길 수밖에 없다. 같은 칩이더라도 다른 파운드리 제품과 차이가 뚜렷하다.”
한 국내 팹리스 기업에서 일하는 지인은 대만 TSMC의 반도체 제조 기술을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라고 표현하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TSMC의 벽이 첨단 공정으로 갈수록 더 높아진다고 했다. 삼성 파운드리에도 일부 생산을 맡기고 있지만, 고성능 제품만큼은 TSMC만을 고수한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최고 품질의 제품을 만드는 게 기업의 목표라는 걸 알면서도 국내 파운드리로는 그 목표를 이룰 수 없다는 현실이 한편으로는 씁쓸하게만 느껴졌다.
실제로 파운드리 시장에서 TSMC의 위상은 더욱 공고해지고 있지만, 삼성 파운드리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TSMC는 올해 2분기 6735억1000만 대만달러(약 28조5000억 원)로, 전년 동기 대비 약 40.1% 늘었다. 지난달 매출은 2569억5000만 대만달러(약 10조8300억 원)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무려 45%나 증가했다. 반면 삼성 파운드리는 반도체 시장 호황에도 불구하고 2분기 3000억 원 안팎의 적자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시장조사기관 카운터포인트에 따르면 1분기 기준 TSMC의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62%로, 2위인 삼성 파운드리(13%)를 크게 앞섰다. 양사 간 점유율 격차도 전 분기 47%포인트(p)에서 49%p로 확대됐다.
더 안타까운 건 향후 인공지능(AI) 반도체 시장을 이끌 국내 스타트업들의 TSMC 선호 현상이 더 심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퓨리오사AI는 2세대 AI 반도체 ‘레니게이드’를 TSMC의 5나노미터(㎚ㆍ1㎚=10억분의 1m) 공정으로 양산하고 있다. 앞서 지난해 선보인 1세대 제품 ‘워보이’는 삼성 파운드리를 통해 제작했는데, 돌연 제조사를 변경한 것이다. 그간 삼성 파운드리를 고수하던 딥엑스 역시 최근 TSMC와도 거래하기로 하면서 멀티 파운드리 전략으로 변경했다. 특히 딥엑스는 2022년 삼성 파운드리로부터 멀티프로젝트웨이퍼(MPW) 서비스를 지원받는 등 이른바 ‘삼성 파운드리 키즈’였던터라 이번 TSMC 선택이 새삼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
이제는 정말 각성해야 할 때다. 본격적인 AI 시대, 고객 맞춤형 제품 트렌드가 강화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한번 주춤하면 평생 주도권을 놓칠 수 있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파운드리, 패키징 등 세 개 사업을 모두 갖춘 만큼 고객 맞춤형 AI 턴키(일괄 공급) 솔루션을 제공하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이러한 기술 경쟁력 강화에 더해 향후 미래를 위한 가치 투자 역시 확대해야 한다. 특히 국내외 유망한 AI 팹리스 스타트업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지원해 향후 잠재 고객으로 완벽히 끌어들이는 전략이 필수다. 최근 ‘실적으로 보여주겠다’는 이재용 회장의 말이 이번에는 꼭 실현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