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초희 부국장 겸 금융부장
꽉 막힌 대출에 실수요자 피해
‘빚투 문화’등 구조적 문제를 봐야
“방향은 맞지만 속도조절이 필요하다.”
윤석열 정부 들어 가장 많이 들어본 얘기 중 하나다. 대표적인 게 의대 정원 확대일 것이다. 누구나 동의하지만 거칠고 과격한 방식이 의료 선진국인 한국에서 “아프면 큰일난다”라는 웃픈 말까지 만들어냈다. 가야 할 방향인 것은 맞지만 ‘난폭운전’을 하다보니 7개월째 파행을 거듭하며 비정상 체제로 연명하고 있는 현실. 피해는 오롯이 국민들과 현장에 남아서 희생하는 의료진의 몫이다.
목숨이 촌각에 달린 급박한 상황까지는 아니지만 최근 금융권에서도 거친 운전자(?)로 인해 대출 시장이 혼돈에 휩싸였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은행 대출 관련 시장 개입 발언을 잇따라 한 데 따른 것이다. 그의 한마디에 은행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그의 눈치를 보며 하루아침에 내부 정책을 바꾸기에 이르렀다. 난데없이 집이 있는 사람은 은행 대출을 받지 못하게 되거나 전세대출이 막히게 됐다.
서울 ‘올림픽파크포레온’(옛 둔촌주공아파트)의 경우 11월 입주를 앞두고 수분양자와 입주자들은 주요 은행들이 ‘조건부 전세대출 취급 제한’ 적용을 각각 달리 하면서 한바탕 논란이 됐다. 당장 입주 계획에 차질이 생겼기 때문이다. 집이 있는 사람이 자녀 교육 때문에 집에 세를 주고 다른 곳으로 전세를 얻으려 할 때 전세대출이 막혀 낭패를 본 사례도 속출했다. 실수요자들의 불만이 폭주하자 김병환 금융위원장이 등판해 정리에 나섰다. 결국 이 원장의 사과와 ‘은행의 자율적 관리’로 일단락됐지만 지난 두 달여 동안 대출시장은 ‘오락가락 메신저’에 제대로 융단폭격을 맞았다.
한바탕 요란한 소동이 끝나자 9월 가계대출 증가폭은 주춤해진 것으로 집계됐다.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9월 가계대출 증가액이 4조5000억 원 안팎으로 전월 증가폭의 절반 수준에 그쳤다. 정부의 강력한 대출 규제가 효과를 보기 시작했다고 자화자찬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이것은 숫자놀음에 불과하다. 9월은 추석 연휴로 영업일수가 줄어든 달이다. 전문가들도 10월 이사철을 앞두고 있으니 잠시 숨을 고르는 것일 뿐이라며 조금 더 지켜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가계부채 문제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시시각각 바뀔 수 있다. 하지만 시장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의 말 한마디가 순식간에 뒤집힐 때마다 은행들은 바람따라 눕고, 시장의 혼란은 집 한 칸 마련해보겠다는 서민들의 피해로 돌아간다.
가계부채 문제는 근본 원인을 직시해야 한다. 부동산 가격 상승과 빚내서 투자하는 문화, 저성장 고착화 등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아무리 땜질해봤자 소용없다. 이는 마치 암 환자에게 감기약을 처방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달은 긴축, 다음 달은 완화라는 식의 ‘언 발에 오줌 누기’ 정책은 시장에서 아무도 믿지 않는다. 오락가락 정책, 눈가리기식 규제로는 가계부채라는 거대한 눈덩이를 막을 수 없다.
가계부채의 근원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집값이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지난달 서울의 아파트값은 전달보다 1.27% 상승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2018년 9월(1.84%) 이후 6년 만에 최대폭이다. 이달 셋째 주(16일)까지 26주 연속 상승세다. 아파트에 이어 빌라, 오피스텔까지 상승기류가 옮겨붙었다. 2022년 8월 이후 23개월간 하락했던 서울 오피스텔 매매가격지수가 8월에는 전달보다 0.03% 오르며 상승 전환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출 규제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건 끓어 넘치는 냄비에 뚜껑 하나 더 덮는 것일 뿐이다. 정부와 금융당국은 눈앞의 수치에만 매달리는 근시안적 접근을 관둘 때가 됐다. 오락가락 땜질식 정책의 끝은 뻔하다. 실질적인 답을 찾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빚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다 익사하고 말 것이다. cho77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