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佛 지도부 리더십 회복이 관건
“유럽은 이제 끝난 것이 아닙니까?” 유럽은 우리의 주요 교역상대국일 뿐만이 아니라 자유와 인권 등 가치를 공유하는 파트너이기에 기회가 되는 대로 유튜브에 종종 출연해 필자의 전공인 유럽 정치경제를 이야기해 왔다. 그런데 유럽이 수년간 저성장을 지속하다 보니 이런 질문을 빈번하게 받는다. 저성장 속에서도 복지 지출을 줄이는 것 같지는 않고, 그렇다고 속 시원한 개혁 움직임은 없다. 지역통합의 모범으로 보이는 유럽연합(EU)은 탄소국경세 도입과 같은 규제에 앞장서 왔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유럽통합의 역사에서 10년 넘게 계속된 경기침체를 극복하고 재도약에 성공한 1980년대 말과 1990년대를 떠올린다. 당시 재도약을 가능하게 했던 리더십을 중심으로 EU의 재도약 가능성을 점검해보자.
“유럽이 좀 더 생산성을 높이지 못하면 우리의 사회모델(복지시스템) 유지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할 수가 없을 것이다.”
유럽중앙은행 총재를 역임한 이탈리아의 마리오 드라기 전 총리가 지난달 9일 EU의 문제점을 종합적으로 진단한 보고서를 공개했다. 드라기는 낮은 생산성, 높은 에너지 가격, 심각한 투자 부족, 불충분한 자본시장 통합 등이 유럽을 저성장의 늪에 빠지게 했다고 분석했다. 특히 정보통신(IT) 분야의 뒤처짐을 강조했다.
1990년 말에 시작된 인터넷 붐, 디지털 물결에 올라타지 못하면서 미국과 비교해 생산성이 크게 떨어졌다. 유럽에 내세울 만한 인터넷 기업이 없고 인터넷을 활용한 부가가치 생산이 미미했다는 것. 2002년 당시 EU 15개국의 구매력 평가를 기준으로 한 국내총생산(GDP)은 미국보다 4%포인트 정도 많았다. 지난해 말 현재, 동일 기준으로 미국이 EU 27개국보다 12%포인트 더 많다. 21년 사이에 EU 경제는 꾸준하게 성장한 미국에 견줘 낮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이 보고서는 IT 기업의 생산성 증가를 제외하면 미국과 EU의 지난 21년간 생산성이 거의 동일하다고 결론지었다. 그렇기에 디지털 전환에 과감하게 투자할 것을 조언했다. 아울러 친산업적인 녹색 전환을 지속할 것, 그리고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계속 고조되는 가운데 국방투자를 늘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드라기 보고서에 대해 EU의 행정부 역할을 하는 집행위원회나 독일과 프랑스 등 회원국들도 원칙적으로 지지를 보였다. 그러나 이를 정책으로 실행하는 데에는 정치적 의지가 필요하다.
지난 1월 “단일시장 꿈 남기고 떠난 자크 들로르” 칼럼에서 설명했듯이 1970년대 중반부터 10년 넘게 유럽경제는 지금보다 더 낮은 저성장에 시달렸다. 1973년과 1979년 두 차례의 석유파동으로 대부분 원유 수입에 의존하던 유럽공동체(EC: EU의 전신) 회원국들은 물가가 최소 2~3배 치솟았다. 그런데 경제는 침체에 빠진 초유의 스태그플레이션을 겪었다. 유럽공동체 회원국들은 공동체 차원에서 힘을 모아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비관세장벽을 쌓아 자국 우선의 정책을 10년 넘게 실시했다.
1985년부터 10년간 집행위원장으로 재직한 자크 들로르는 이런 비관세장벽을 과감히 제거해야 유럽이 다시 도약할 수 있다고 봤다. 유럽통합을 이끌던 독일과 프랑스도 이에 동의하면서 유럽 차원에서 단일시장 형성이 촉진됐다. 비관세장벽을 제거하기 위한 과감한 규제완화, 그리고 환경 등 일부 분야에서의 규제 도입 등을 결합해 280여 개의 단일시장 관련 법이 불과 7년 만에 통과돼 실행됐다. 1992년까지 단일시장 완성을 목표로 해서 ‘1992년 계획’이라고 불렸다.
이런 정책에 힘입어 1980년대 말부터 유럽공동체 회원국들의 생산성이 증가하기 시작해 1990년대 말에는 미국의 95% 선까지 따라잡았다. 그러던 것이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EU의 생산성이 차차 떨어지기 시작해 현재는 미국의 80% 선에서 소폭 등락을 거듭 중이다.
1980년대와 비교해 EU를 재도약시킬 리더십이 부족한 게 가장 큰 문제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두 달 반 전에 유럽의회로부터 승인을 받아 연임에 성공했다. 앞으로 5년 더 EU를 이끌게 되며, 10년간 행정부의 수장으로 있게 된다. 그는 그린 딜을 비롯해 우크라이나 전쟁 대응까지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런데 독일과 프랑스의 경우 총리와 대통령 모두 레임덕에 빠졌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데 리더십을 구성하는 손바닥 하나가 없다.
독일 사회민주당의 숄츠 총리는 녹색당, 자유민주당으로 구성된 3당 연립정부를 이끌고 있다. 1년 전부터 3당의 지지율이 30% 중반에 불과한 데다 지난 6월의 유럽의회 선거를 비롯해 9월의 구동독 지방선거에서 집권당이 잇따라 최악의 성적을 거두면서 조기 총선설도 솔솔 나온다. 원래 내년 9월 말에 총선이 예정돼 있다. 일부에서는 조기총선 유발자라는 비난을 모면하기 위해 3개 집권당이 연정 붕괴의 명분을 쌓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도 7월 초 조기총선에서 과반을 상실해 앞으로 2년 반 넘게 허약한 대통령으로 남을 듯하다. 중도파인 대통령이 중도우파의 미셸 바르니에를 총리로 임명해 정부를 꾸렸다. 그러나 극우정당인 국민연합(RN)과 중도좌파가 합심하면 언제든지 총리를 불신임할 수 있다. 잦은 정부 교체가 예상되기에 정치적 불확실성이 크다.
숄츠와 마크롱 모두 국내정치적 입지가 매우 허약한데 EU 차원에서 저성장 극복을 위한 요구를 할 유인이 별로 없고, 설령 요구를 하더라도 실행될 가능성이 낮다. 지난 2일 베를린에서 숄츠와 마크롱이 양국 정상회담을 열었지만 정책 차이만 확인했을 뿐 아무런 합의가 없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EU가 저성장을 극복하지 못하면 국제정치경제에서 EU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국가들은 줄어들 게 뻔하다. 이렇게 되면 지역블록을 만든 원래의 목표인 국제무대에서 위상 확보 등에서도 점차 멀어진다. 유럽언론에서 1980년대 경제재도약을 이뤘던 때를 상기하며 EU의 분발을 촉구하는 기사를 종종 볼 수 있다. 그러기에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라는 말이 다시 떠오른다. 인간은 역사에서 배운다고 하지 않았던가.
대구대 교수(국제정치학)
‘하룻밤에 읽는 독일사’ 저자
팟캐스트 ‘안쌤의 유로톡’ 제작·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