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정치 영광 뒤의 비극
(편집자주: 역사적으로 글로벌 사회·문화·경제를 좌우하는 명문 가문은 존재해왔다. 유럽의 로스차일드 가문이 글로벌 자본시장을 주무르듯 이른바 로열패밀리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파워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글로벌 경제를 이해하고 역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로열패밀리를 이해하고 분석하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13회에 걸쳐 글로벌 로열패밀리의 역사와 자본 그리고 그들의 영향력을 분석한다)
오는 11월 미국 중간선거의 최대 화제는 케네디 가문의 부활 여부였다.
조셉 케네디 3세는 유력한 출마 예상자였지만 결국 출마를 포기했다. 여전히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에 젖어있는 미국인들에게는 실망스러운 소식이었다.
케네디가의 워싱턴 정치무대 등장은 존 F. 케네디가 1946년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하면서 시작됐다. 그는 52년 상원의원에 선출된 이후 60년 대통령에 당선됐다.
케네디 전 대통령은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를 법무장관으로 기용했다. 로버트 케네디는 형인 케네디 전 대통령이 암살된 65년부터 뉴욕주를 대표하는 상원의원으로 활동했다.
로버트 케네디의 동생인 에드워드 케네디까지 62년 상원의원에 당선되면서 3형제가 모두 상원에 입성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그는 지난해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50여년에 걸쳐 ‘상원의 사자’로 불리며 민주당의 아버지 역할을 톡톡히 했다.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은 2008년 대선에서도 노익장을 과시하며 버락 오바마 후보자를 당선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세의 행보도 화려했다.
로버트 케네디의 장남인 조셉 케네디 2세는 87년부터 12년에 걸쳐 메사추세츠주 하원의원으로 일했다. 에드워드 케네디의 아들인 패트릭 케네디 또한 로드아일랜드주 하원의원으로 활약하며 정계에서 이름을 날렸다.
그는 1917년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실업가 조셉 케네디의의 아들로 태어났다. 케네디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후 1941년 미 해군에 지원해 2차 세계대전 당시 남태평양에서 해군 장교로 근무했다.
전세계에서 벌어진 참혹한 전쟁 후 저널리스트의 길을 가고자 했던 케네디는 아버지의 바람으로 정치계 입문을 결정한다.
케네디는 1960년 미국의 35대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미 자유주의의 아이콘이 됐다.
케네디는 취임 2년 동안 피그스만 침공, 쿠바 미사일 위기, 남미 공산주의, 베트남 전쟁 간접 개입, 베를린 장벽 설치와 위기 등 냉전의 몸살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자유주의적이고 건설적인 방식으로 해결점을 모색하면서 세기의 대통령으로 평가받았다.
이 같은 명성과 영광은 잠시였다. 1963년 그의 머리를 겨눈 총성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그의 죽음과 관련 일본 작가 히로세 다카시는 1986년 출간된 ‘제 1권력’을 통해 전세계 금융과 산업자본의 지배자였던 모건과 록펠러의 주도로 이뤄진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해 화제를 모았다.
1962년 당시 모건과 록펠러의 연합계열이었던 US스틸과 베들레헴스틸이 철강 가격을 올리려 하자 케네디 대통령은 이들 기업에 대한 철강 주문을 중지하게 된다.
산업계를 장악한 이 거대 지배자들에 대해 케네디 대통령이 반격하자 두 집안은 철강가격 인상을 철회하긴 했지만 대신 리 하비 오스월드라는 암살자를 동원해 두 집안의 근본적인 장애를 제거했다는 것이 음모론의 골자다.
케네디 암살과 관련해서는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도 이름을 올렸다. 케네디 대통령이 합중국 국고폐를 유통시켜 연준의 권한을 약화시키려고 하자 연준이 케네디 저격에 개입했다는 것이다.
한편 경제계에서도 케네디 가문의 입김은 상당하다.
지난 9월 매물로 나오면서 화제에 올랐던 시카고 소재 머천다이즈마트의 회장은 크리스토퍼 케네디다. 그는 로버트 케네디의 아들로 부동산 신탁회사 보나도 리얼티 트러스트와 공동으로 경영을 맡았다.
머천다이즈마트는 존 F. 케네디의 아버지 조셉 케네디가 1945년 1250만달러에 사들였다. 미 국방부가 세워지기 전까지 이 건물은 단일 우편번호를 사용하는 최대 규모의 건물로 유명했다.
케네디 가문은 이 건물을 지난 1998년 매각해 6억2500만달러를 벌어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