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한 살 청년의 꿈은 원대했다. 메이저리그 최고 투수가 되겠다던 한 동양인 청년은 태평양 건너 미국대륙을 밟았다. 청년은 야구공 하나로 전 세계 강타자들을 모조리 돌려세웠다. 그가 가진 건 오로지 뚝심이었다. 그는 메이저리그 17년 동안 124승을 기록, 일본인 투수 노모 히데오가 가진 동양인 메이저리그 최다승 기록을 갈아치웠다. 그는 박찬호다.
박찬호는 한국 스포츠사에서 가장 위대한 스포츠스타로 손꼽힌다. 불가능이라 여겼던 메이저리그가 아니던가. TV로만 보던 메이저리그는 그야말로 꿈의 무대였다. 그저 마운드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박찬호는 메이저리그에서 무려 17년간을 호령하며 한국 야구의 위상을 높였다. 덩치 큰 서양 타자들이 박찬호의 강속구에 맥없이 헛스윙하며 물러나는 모습은 1997년 말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실의에 빠진 국민에 희망으로 비춰졌다.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도전기가 정점을 찍은 것은 2000년이다. 18승 10패 3.27의 평균자책점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달성했고, 한국인 최초 올스타전 출전 꿈을 이뤘다. 이듬해인 2001년에도 15승(11패ㆍ평균자책점 3.50)을 올려 메이저리그 최고 투수다운 면모를 이어갔다.
그리고 14년이 지났다. 박찬호는 18일 광주-기아 챔피언스필드에서 열린 2014 한국야쿠르트 세븐 프로야구 올스타전에 고향 팀인 한화 이글스 유니폼을 입고 감격의 은퇴식을 치렀다. 메이저리그 17년 동안 단 하루도 있지 않았던 고국 무대였기에 더욱 더 코끝이 찡해진다.
그러나 박찬호는 진정 성공한 스타였을까.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진출은 위대한 도전으로 끝을 맺었지만 무모한 해외 진출과 국내 무대를 가볍게 여기는 병폐까지 싹트게 했다.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성공신화는 후배 선수는 물론 한국 스포츠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박찬호에 이어 조진호ㆍ김병현ㆍ서재응ㆍ최희섭ㆍ김선우 등이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았고, 지금의 류현진에 이르렀다.
여자프로골프는 해외에서 꽃피운 가장 눈부신 종목이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명예의 전당에 오른 박세리를 비롯해 김미현ㆍ박지은ㆍ장정ㆍ신지애ㆍ박인비에 이르기까지 세계 골프 판도는 한국인에 의해 발칵 뒤집혔다.
축구는 2002년 한ㆍ일 월드컵 이후 네덜란드로 무대를 옮긴 박지성ㆍ이영표ㆍ송종국 등이 유럽 진출 물꼬를 텄다. 지금은 손흥민ㆍ기성용ㆍ이청용ㆍ구자철 등이 유럽 무대를 누비고 있다.
그렇다면 원대한 포부를 안고 해외로 떠난 선수들은 모두 성공했을까. 안타깝지만 그렇지 않다. 준비되지 않은 해외 진출은 오히려 뼈아픈 실패로 되돌아왔다. 일부 성공한 선수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해외파는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고 씁쓸한 퇴장을 맞이하고 있다.
2014 브라질 월드컵을 이끈 홍명보 전 대표팀 감독은 국내에서 맹활약한 선수 대신 벤치 신세의 해외파를 중용하며 본선에 나섰지만 시종일관 무기력한 경기력만 보이다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무작위 해외진출은 야구ㆍ축구ㆍ골프 등 국내 리그(투어)의 진통으로 이어졌다. 스타 부재와 인기 하락이 그것이다. 해외에서 성공한 선수들이 자극제ㆍ자신감으로 이어진다면 그보다 좋은 것은 없다. 그러나 국내 무대를 가볍게 여기거나 준비 없이 떠나는 무모한 해외 진출은 결국 뼈아픈 시련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만약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하지 못했다면?” 이 물음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없다면 박찬호의 위대한 도전은 결국 무모한 도전이기도 했다.
그 해답은 후배 선수들이 쥐고 있다. 준비 없는 해외 진출이 얼마나 쓰라린 상처로 되돌아오는지 알아야 한다. 박찬호의 위대한 도전과 발자취가 후배들의 준비 없는 무모한 도전으로 퇴색되지 않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