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액 객관적 입증 힘들고
상급심서 벌금ㆍ집유 감형도
#삼성중공업에서 근무하던 중국인 선급검사관 장모 씨는 드릴십(원유시추탐사선) 건조 기술을 이동식저장장치(USB)에 넣어 유출했다. 해당 기술은 삼성중공업이 수백억 원의 연구개발비를 투입한 것으로 산업자원부 장관에 의해 조선해양 분야 ‘국가핵심기술’로 지정된 바 있다. 이 사건을 맡은 재판부는 “국내외 시장에서 차지하는 기술적ㆍ경제적 가치가 높고 관련 산업의 성장잠재력이 커 해외로 유출될 경우 국가의 안전보장 및 국민경제의 발전에 중대한 악영향을 줄 우려가 있는 국가핵심기술을 통째로 복사, 저장하는 방법으로 취득해 사안이 가볍지 않다”면서도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를 준비해야 할 긴박한 상황에서 기술력은 기업의 미래를 담보할 핵심 동력이다.
특히 산업기술 유출은 곧 국부 유출이나 다름없다. 기술의 차이가 기업의 성패는 물론 국가 경쟁력을 좌우한다. 산업 스파이 범죄를 두고 이른바 ‘21세기 매국노’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러나 기술 유출 범죄의 심각성에 비해 처벌은 여전히 솜방망이 수준에 그치고 있다.
6일 대검찰청, 대법원 등에 따르면 검찰이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산업기술보호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긴 총 65건(약식기소 제외)의 사건 중 실형 선고는 4건에 불과하다. 이를 인원수로 분류하고 부정경쟁방지법 위반 혐의도 포함하면 총 722명 가운데 실형이 선고된 피고인은 고작 70여 명으로 집계됐다.
일반 형사사건의 실형 선고율과 비교하면 기술유출 범죄에 대한 관대한 처벌이 더욱 도드라진다. 1심 기준 전체 형사범의 실형 선고율은 21.5%인데, 기술유출 범죄자(산업기술보호법+부정경쟁방지법 위반)의 실형 선고율은 9.7%에 불과했다. 대부분은 집행유예(49.0%) 또는 벌금형(39.4%)을 받았다.
이는 관련 현행법이 기술유출 범죄자에 대해 집행유예나 벌금형 등으로 처벌받을 수 있는 여지를 남겨뒀기 때문이다. 산업기술보호법은 산업기술을 외국에서 사용하거나 사용되게 할 목적으로 빼돌리면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규정한다. 법정형의 하한선을 정해두지 않아 판사의 재량에 따라 벌금과 집행유예가 선고될 수 있는 것이다.
기술 유출 범죄와 관련한 대법원 양형위원회의 기준도 법원의 솜방망이 처벌에 한몫했다. 양형위는 기술의 국외 침해와 관련해 기본이 징역 1년~3년 6개월, 감경 사유가 적용되면 최소 징역 10개월~1년 6개월로 한정했다.
국가 핵심 기술을 유출해도 처벌은 약하다. 유출된 기술의 피해액 등 실질적인 손해를 입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객관적으로 입증할 방법이 없다는 맹점이 존재한다.
폴리우레탄 시스템과 초저온보냉재 생산 기업 A사에서 근무하던 연구원 박모 씨는 ‘LNG선 카고탱크 초저온보냉재’ 관련 핵심 기술 자료 등을 개인 이메일로 보내는 수법으로 총 15건의 기술 정보를 유출했다. 2013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A사의 초저온보냉제 기술을 ‘국가핵심기술’로 지정했다.
1ㆍ2심 재판부는 “피고인이 유출한 정보가 국가핵심기술로 해외로 유출될 경우 국가의 안전보장 및 국민경제의 발전에 중대한 악영향을 줄 우려가 있다”면서도 “피해 회사에 현실적인 손해가 발생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2017년 2월 박 씨의 상고심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산업기술 유출 범죄자에 대해 하급심에서 실형을 선고해도 상급심에서 감형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중국인 왕모 씨는 친분이 있던 다른 중국인 선급검사관을 통해 삼성중공업 소유의 국가핵심기술인 LNG선 관련 산업기술을 취득했다. 동료 선급검사관은 ‘LNG선 카고탱크 제조 기술 도면’, ‘건조 공정 사진’ 등을 외장형 하드디스크로 옮겨 왕 씨에게 전달했다.
1심 재판부는 “해당 자료는 국가핵심기술과 관계된 것으로 엄격히 유출이 금지돼 있는 것”이라며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2심은 “피고인이 타국에서 오랜 구금 생활을 하며 자신의 잘못을 깊이 반성하고 있다”며 징역 10개월로 감형했다.
삼성디스플레이가 3년간 약 100억 원을 투자해 세계 최초로 개발한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제조 관련 기술을 유출한 연구원 등이 적발됐다. 검찰은 최근 삼성디스플레이 수석연구원 등 3명을 산업기술보호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기소 했다.
이처럼 산업기술 유출 범죄는 끊이지 않는다. 검찰이 산업기술 범죄와 관련해 사법처리한 인원은 2015년 19명에서 2019년 70명으로 급증했다.
법조계는 기술 유출로 인한 처벌의 강도보다 이로 인해 얻게 되는 경제적 이익이 더 큰 것이 범죄가 늘어나는 이유라고 입을 모은다.
발광다이오드(LED) 기술을 탈취한 혐의로 대만 LED 제조사인 에버라이트에 최근 법정 최고형이 내려졌다. 에버라이트는 서울반도체의 와이캅 기술을 이용한 헤드램프 등 자동차 LED 제조 산업 기술을 대거 탈취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와이캅 기술은 일반 인쇄회로기판 조립라인에서 패키지 공정(칩을 기판에 전기적으로 연결)없이 납과 주석으로 LED 칩을 실장하는 기술이다. 서울반도체는 이 기술을 개발하는 데 7년 동안 5600억 원을 투자했다. 그러나 에버라이트에 내려진 법정 최고형은 벌금 5000만 원에 불과했다.
선진국들은 산업기술을 보호하기 위해 법률을 적극적으로 개정하는 등 처벌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은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경제스파이법’을 수차례 바꿨다. 특히 국가 전략기술을 해외로 유출하면 영업비밀 절도죄가 아니라 ‘간첩죄’로 가중 처벌한다. 법정 최고형은 징역 20년, 추징금은 최대 500만 달러(약 59억4750만 원)에 이른다.
일본도 2015년 부정경쟁방지법을 개정해 벌금을 인상하고 범죄 수익에 대한 몰수 규정을 대폭 강화했다. 자국 기업의 영업비밀을 해외로 빼돌리면 가중처벌을 받도록 하고 천문학적인 손해배상도 인정한다. 해외 기술유출에 대한 벌금은 개인 3000만 엔(약 3억3600만 원), 법인 10억 엔(약 112억430만 원)에 달한다.
기술 유출에 대한 법적 처벌을 강화하는 것만큼 기업 자체적으로 보안 전담 조직을 두는 것도 중요하다. 부정경쟁방지법상 기술 보호 요건에 해당하려면 △비(非)공지성 △경제적 유용성 △비밀 관리성 등 세 가지를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기업은 보안 전담 조직이 없어 해당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고민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국가핵심기술 보유기관 보안조직 현황’을 분석한 결과 국가핵심기술을 보유한 94개 기관 중 72%가 보안 전담 조직이 없고 86%는 보안 전담 임원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법무법인 화우 이광욱 변호사는 “특히 중견·중소기업은 여건상 보안전담 인력과 설비 등에 대한 투자 활동이 저조하다”며 “개발 인력에 대한 실질적 보상 시스템을 정립하고, 보안 인프라를 구축하는 등 투자와 경영진의 의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