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그리는 공정지도] 무시된 절차는 또다른 불공정…“모든 노력이 물거품 돼”

입력 2021-06-23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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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을 내세운 ‘불공정’...공정 정책 반기 드는 청년들
결과·기계적 공정만 좇아…학력·스펙 노력 ‘매몰비용’ 돼

5성급 호텔 조리사로 일하던 김승준(26·남·가명) 씨는 최근 직장을 그만두고 늦은 나이에 수학능력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명문대를 졸업해 대기업 정규직으로 재취업하는 게 목표였다.

그런 김 씨에게 인천국제공항공사 비정규직 정규직화 논란은 좌절감만 안겼다. 그에게 대기업이나 공기업 정규직은 남들보다 좋은 스펙을 쌓고 입사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이들에게만 허락되는 자리였다. 그런데 이렇다 할 스펙도, 입사전형도 없이 비정규직 2년 일했다고 정규직 전환이라니…. 김 씨는 “기득권층이 ‘부모 찬스’로 기회를 잡는 것도 화가 나지만, 인천국제공항공사 사태처럼 과정상의 노력을 무시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그는 정부가 ‘절차의 공정’을 무시하고 ‘결과의 공정’만 추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모순되게도 정부가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추진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공정’이었다. 출발이 공정하지 않았으니, 출발선에서 뒤처진 이들을 과정에서 배려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부 관점에서 ‘공정’은 청년들의 입장에서 ‘새로운 불공정’이었다.

이런 상황은 비정규직 정규직화에 국한되지 않는다.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출신으로 공기업 입사를 준비 중인 장준호(29·남·가명) 씨는 블라인드 채용이란 벽에 부딪혔다. 블라인드 채용은 지원자의 출신 학교·지역 등을 배제하고 직무역량만으로 평가하는 제도다. 취지는 채용 과정에서 학연·지연·혈연으로 대표되는 ‘인맥’이 개입될 여지를 없애는 것이다.

하지만 장 씨에게 학벌은 ‘노력의 결과’다. 지방 출신인 그가 연고도 없는 서울에 올라온 이유도 오로지 대학 때문이다. 출신 대학이 성실함, 지식수준 등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학벌을 기준으로 채용 여부를 결정하는 건 공정하다는 게 장 씨의 생각이다. 그는 “서울권 대학에 오려고 피 터지게 공부했고, 스펙을 쌓기 위해 토익 학원도 여러 번 다녔다”며 “이제 와서 ‘블라인드’를 씌우니 그동안 쌓아온 모든 게 허사가 됐다”고 토로했다.

뒤늦게 ‘실력으로 승부를 보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나, 이번엔 지역인재 채용제도가 발목을 잡았다. 지역인재 채용제도는 공공기관이 기관 소재 시·도 대학을 졸업자를 일정 비율로 채용하도록 하는 일종의 할당제다. 장 씨와 같은 서울 대학 졸업자는 공공기관 소재 시·도 출신이라도 해당하지 않는다. 해당 시·도 외 대학 졸업자들은 할당분을 뺀 정원을 놓고 경쟁해야 한다.

그는 “지방에서 열심히 공부해 서울로 올라왔고, 집세에 생활비까지 감당해 가며 졸업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공정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교육정책도 다르지 않다. 정부는 특수목적고등학교(특목고)·자율사립고등학교(자사고)를 2025년까지 일괄적으로 일반계 고등학교로 전환하겠다고 못 박았다. 2019년 ‘조국 사태’로 촉발된 학생부종합전형(학종) 실태조사에서 고등학교 서열화가 명확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출신 고교를 배제한 공정한 입시환경을 마련하겠다는 취지다.

올해 대학교에 입학한 강예민(20·여·가명) 씨는 일반고를 나왔지만 대학 동기들 가운데 특목고·자사고 출신이 많다. 친구들이 말 그대로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도 들었다. 그는 “특목고·자사고를 가려면 능력뿐 아니라 노력이 뒷받침돼야 한다”며 “그런 능력과 노력을 간과하고 다 같은 일반고에 입학시키는 게 오히려 불공정한 게 아니냐”고 반문했다.

청년들이 말하는 노력에는 그동안 투자한 시간·금전적 비용도 포함된다. 입시·취업을 포기하거나, 목표를 하향 조정한다면 지금껏 쏟아부은 시간과 돈은 회수 가능한 경제적 가치가 ‘0’인 매몰비용이 된다. 강 씨는 “기회조차 절실한 청년들은 공정한 경쟁이 성취를 보장해 주길 바란다”며 “정부가 지향하는 공정은 청년들에게 주어진 기회마저 무너뜨리는 격이다”라고 말했다.

세종=김지영 기자 jye@

김예슬 수습기자 viajeporl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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