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권 전세대출 심사 강화 등 거론
중소기업에 다니는 30대 황 모씨는 최근 정부의 전세대출 규제 움직임에 근심이 깊어지고 있다. 내년 초 전세 만기를 앞둔 상황에서 높아진 전셋값을 추가로 감당하려면 1억 원가량 필요한 상황인데, 전세대출이 막히면 졸지에 ‘전세 난민’ 신세가 될 수도 있어서다.
금융당국의 전세대출 옥죄기 움직임에 무주택 실수요자들의 속앓이가 깊어지고 있다. 정부의 강한 드라이브에도 불구하고 가계대출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금융당국은 전세대출을 막을지 여부를 두고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고승범 금융위원장, 정은보 금융감독원장은 30일 거시경제금융회의를 개최한다. 이를 바탕으로 다음 달 초 가계부채 종합대책을 발표하겠다는 게 정부 계획이다. 홍 부총리는 “올해 상반기 대출이 지나치게 많이 진행돼 연간 대출 평년 목표를 관리하려면 하반기 전세대출은 스퀴즈(squeeze·쥐어짜다)할 수밖에 없다”면서도 “실수요자 대출에 지나치게 피해가 가지 않는 방향에서 방안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가계부채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자 정부도 최근 전방위적인 관리에 나섰다. 금융당국은 금융사에 가계대출 관리를 더욱 엄격하게 하라고 지시했고, 은행권에선 대출 문을 걸어 잠그고 있다.
KB국민은행은 29일부터 전세자금대출의 타행 상환조건부 신규대출 취급을 제한한다. 임대차계약 갱신 시 전세대출 한도는 전셋값(임차보증금) 증액 범위 이내로 축소될 예정이다.
앞서 NH농협은행은 신규 주택담보대출을 전면 중단했고 우리은행은 개인 신용대출 한도를 연 소득 이내로 제한했다. 신한은행·하나은행도 대출 금리 상승, 한도 축소로 대응하고 있다.
은행권이 연이은 대출 조이기에 나서면서 전세대출 실수요자들은 혹시라도 원하는 금액만큼 대출이 나오지 않을까 걱정이 커지고 있다. 특히 전셋값 급등에 따라 실수요자들의 자금 조달 계획에 차질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전국 아파트 전셋값은 2019년 9월부터 지난달까지 23개월 연속 오름세를 기록했다.
특히 임대차2법(계약갱신청구권·전·월세 상한제)이 본격 시행된 지난해 8월부터 올해 1월까지 1%대 상승률(1.02%→1.52%→1.1%)을 기록하기도 했다. 전셋값의 1%대 상승률은 2011년 11월(1.33%) 이후 9년 만이다.
인천 부평구에 살고 있는 20대 박 모씨는 “서울 쪽으로 전세를 알아보고 있는데 은행들이 대출을 조절한다고 해 서둘러 대출심사를 넣었다”며 “혹시라도 대출금이 안 나오면 어디서 돈을 끌어다 써야 할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권대중 명지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전셋값이 많이 올랐는데도 불구하고 전세대출을 규제하게 되면 세입자들은 외곽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전세대출이 늘어난 건 전셋값이 그만큼 올랐기 때문인데 정부가 투기 의심 대출에 주목하면서 반발하는 목소리도 높다.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시중은행의 전세자금대출은 105조2127억 원에서 120조7251억 원으로 14.74% 급증했다. 이 중 98%가 집주인 계좌에 대출금이 직접 입금되는 실수요 전세대출이다.
급증한 가계부채를 고려할 때 대출 옥죄기가 불가피하지만 금융당국은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전세대출을 틀어막았다간 실수요자들의 피해가 불 보듯 뻔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정부가 전세대출 규제를 내놓기보다는 은행을 통해 전세대출 심사를 강화하는 방식을 택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