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국제 규칙 형성에 적극적 나서
외국산 제품 방어벽 역할…원자재 '경제 안보' 관점도
미국도 관심 커…'수자원 안보' 중요성 인식 고조
‘탈(脫)탄소’를 뒤이을 미래 환경과 경제 키워드로 ‘순환경제’가 주목받고 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최근 순환경제는 자원채취→ 대량생산→ 폐기로 이어지는 기존 ‘선형경제’를 대체할 새로운 경제 모델로 자원 절약과 재활용을 통해 지속 가능한 성장을 추구하는 개념이라며 현재 탈탄소에 공격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는 유럽연합(EU)이 다음 타깃으로 이를 노리고 있다고 전했다.
벌써 유럽 각국은 국제 규칙을 형성하는 무대에 공무원이나 연구자를 적극적으로 보내 주도권을 잡으려 시도하고 있다. 현재 국제표준화기구(ISO)에서는 물이나 폐기물의 ‘자원화’뿐만 아니라 공업 제품의 공유, 과금형 비즈니스 기업에 대한 투자와 융자 등 순환경제 관련 규정 만들기가 시작되고 있다. EU 회원국들은 ‘ISO 인증제도’로 알려진 농산물과 공산품 국제 규격을 만드는 ISO 회의를 주무대로 활약하고 있다고 닛케이는 강조했다.
숫자로 따지더라도 ISO 내 수백 개의 위원회와 워킹그룹에 존재하는 의장 자리 등에서 유럽 각국이 차지하는 위치가 다른 지역 대비 훨씬 많은 편이다. 일례로 ‘TC323 서큘러 이코노미(순환형 경제)’라는 위원회에서는 실무 그룹 다섯 곳에서 프랑스가 두 곳을, 일본과 네덜란드, 룩셈부르크가 나머지 세 곳에서 각각 좌장을 담당하고 있다. 게다가 결과 전체를 정리하는 의장도 프랑스가 맡고 있다.
유럽이 이처럼 순환경제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는 이들이 이를 환경 문제를 넘어서 경제적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베올리아재팬의 노다 유미코 회장은 “유럽이 생각하는 순환경제는 환경정책이라기보다는 경제정책”이라며 “지구 온난화와 환경 오염에 대응하는 것은 물론이고, 역내 기업이 중국이나 다른 신흥국에 지지 않는 성장력을 회복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계기를 순환경제가 만들 수 있다고 믿고 있다”고 설명했다.
폐플라스틱 등 폐기물은 단순 회수·가공하는 것만으로는 재생품의 품질이 점차 떨어진다. 하지만 여기에 투자를 통해 기술혁신을 일으켜 공급망을 진화시켜 나가면 폐기물도 원재료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유럽에서는 음료병을 다시 병으로 사용하는 사례와 같은 전자를 ‘수평 재활용’으로, 낡은 러닝화를 녹여 새 제품으로 재생하는 아디다스 사례 등을 ‘업사이클’로 분류하면서 후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유럽은 순환경제 관련 국제 규정과 산업의 고도화가 중국이나 일본 제품 물결에 자국 기업이 맞설 수 있는 ‘방어벽’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EU는 이미 제조 단계에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기준으로 가전이나 일용품을 7단계로 분류하는 제도를 시작했는데, 앞으로 순환경제에서 비슷한 구조를 구축할 것으로 보인다. ISO는 이러한 유럽발 규제 확립이나 경제모델을 세계로 넓히는 ‘무대’의 하나가 될 것이라고 닛케이는 강조했다.
또 순환경제는 주요 원자재 재사용을 통해 특정 생산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임으로써 경제 안보 관점에서도 도움이 된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EU는 전기차 보급에서 세계를 리드하고 있는데, 오는 2022년에는 배터리에 포함된 코발트, 텅스텐 등을 역내에서 재생 이용하도록 하는 ‘전지 규칙’을 도입한다. 목적은 중국 등 특정 생산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데 있다.
미국은 국제 규정이나 표준 형성에 있어 유럽과 선을 긋는 경우가 많지만, 순환경제에서만큼은 관심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수자원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캘리포니아주에서 매년 일어나는 산불 원인 중 하나로 온난화에 의한 지하수 감소가 꼽히고 있다. 닛케이는 “미군이 자연재해 대응에 연간 1조 엔(약 10조6650억 원) 가까이 지출하고 있다”며 “이에 수자원을 안보 차원에서 접근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순환경제에는 미·중 문제도 엮여 있다는 해석도 있다. 물 재사용 의무화 등 글로벌 규칙을 제정하면 냉각수를 대량으로 사용하는 데이터 센터 건설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데이터 센터 투자가 많은 중국의 광역 경제권 구상 ‘일대일로’에 대한 일정한 견제 효과로 이어진다는 판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