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사박물관 '한양의 여성 공간’ 첫 발간
신당동(神堂洞), 무원교(巫院橋)를 아십니까? 신당동은 서울 중구에 위치한 지명으로 지금은 떡복이로 유명한 지역이다. 무원교 역시 중구 무학동 무당개울 중간에 있던 다리로 약수동에서 발원해 신당동 중심을 흘러 청계천으로 들어가는 개울에 있던 다리다.
허나 조선시대 이 지역은 조선시대 여성전문직업인 무녀들이 살던 곳으로 지역명 역시 이같은 연유에서 비롯됐다. 지금으로 치면 여성 의사들이 모여살았던 셈이다.
조선시대 한양 여성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았을까? 한양 인구 중 절반이 여성이었지만, 역사에 기록된 인물은 몇 명 되지 않는다. 그마저도 ‘누구의 부인’ ‘누구의 딸’ ‘성씨’ 만으로 불리거나 기록돼 있다.
7일 서울역사박물관은 도시 한양을 여성 시각으로 조명한 서울기획연구 9 '한양의 여성 공간' 보고서를 지난해 12월 발간했다고 밝혔다. 이 보고서에서는 조선시대 한양을 거닐던 여성들의 드러나지 않은 역할과 장소를 주목한다.
조선시대 한양에는 내명부의 수장인 왕비로부터 각사 여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분계층의 여성들이 도성 안팎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이들은 주어진 역(役)을 충실히 수행하며 왕조국가 체제 안정에 이바지했다. 또 사회가 강요하는 유교적 여성관에 매몰되지 않고,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는 종교활동과 가계살림에 보탬이 되는 상업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한양도성 안은 남성보다 여성이 많은 공간이었다. 현존하는 연대기 자료상 인구 데이터를 바탕으로 조선 후기 한양 여성인구 추이를 살펴보면, 17세기 11만6801명에서 19세기 말 16만2141명으로 꾸준히 증가했다. 여성인구는 서부와 남부지역에 가장 많았다. 다만, 정조 13년(1789)을 기점으로 여성 인구가 일정하게 감소해 남성 인구가 여성 인구를 상회했다. 중부의 경우 인구 감소에도 여성인구가 남성인구를 대체로 넘는 양상을 띠는 것으로 확인됐다.
농업을 기간산업으로 하는 조선왕조에서는 권농정책 일환으로 매년 봄 국왕이 주도하는 친경의례를 시행했다. 왕비는 부녀자들의 양잠업을 장려하는 ‘친잠례’를 행했다. 조선시대 최초 친잠례는 성종때 시행됐으나 양란 여파로 인조 이후 시행되지 못했다.
1767년 영조는 친잠례를 부활시키고 폐허가 된 경복궁에 선잠단과 채상단을 설치했다. 당시 정비인 정순왕후로 하여금 선잠단에 작헌례를 행하는 선잠제와 채상단에서 뽕잎을 따는 친잠례를 시행하도록 했다. 친잠의례 후에는 뽕잎을 먹은 누에의 고치를 거둬들이는 의식 '수견의'을 행하도록 했는데, 수견의는 영조때 처음 시행한 왕실 여성 의례였다.
궐내 출산이 허용된 여성은 조선 전기까지 왕비와 왕세자빈처럼 왕위계승자를 낳을 자격이 주어진 여성으로 한정됐다. 선조때 후궁 정씨와 김씨가 궁궐 밖에서 출산하다가 산고병으로 죽게 된 사건이 있은 후부턴 후궁도 궐내에서 출산하는 법제가 마련됐다. 안전한 출산을 위해 산실이 배설되고 호산청이 설치되면서 출산을 돕는 의녀가 배치됐다.
조선 초 여성들이 남자 의원에게 진맥을 받아 치료받는 일을 부끄럽게 여겨 사망하는 일이 빈번하자 제생원 관원이 부인과 치료를 돕는 의녀 선발을 청하면서 의녀제도가 공식화했다.
산파는 '경국대전'에 이미 급료를 지급하라는 조항이 확인될 만큼 출산에 중요한 역할을 한 여성들이었다. 조선 후기 '규합총서'와 '임산예지법'같은 출산 관련 문헌에는 ‘나이 많고 미더운 여성’을 산실에 들인다는 자료가 있어 ‘산파’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한양 여성들에게 치산이재(治産理財)는 중요한 덕목으로 인식됐다. 양반 여성들은 전답 경영과 공인권 매도, 고리대를 통해 가계경영을 주관하기도 했다. 18세기 중반 이재운이 지은 ‘해동화식전’을 보면 9명의 거부 열전이 수록돼 있는데, 그 중 김극술의 처 박 씨와 청파동 과부 안 씨가 여성으로 포함되기도 했다. 박 씨는 가계가 어려워지자 당귀 구매를 통해 매매차익을 실현했으며, 안 씨는 원산 객점 투자를 통해 자금을 모으기도 했다.
여성 상인들은 도성 안팎에 채소전·과일전·침자전·분전·족두리전·자반전 등의 점포를 열어 여성들에게 특화된 상업활동을 주로 펼쳤다. 그 과정에서 남인전(男人廛)과 마찬가지로 국역에 응하기도 했다. 경영이 어려울 때는 정부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대부하거나 상언을 올려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서 적극적으로 운영에 가담했다.
활인서는 도성 밖 동·서쪽에 설치해 전염병의 구료와 민에 대한 구휼활동을 담당하면서 도성 내로 유입되는 전염병 전파를 차단하는 역할을 했다.
국가에서는 한양도성에 거주하는 무녀들을 도성에서 퇴출시키고 관리하기 위해서 무적(巫籍)에 등록 후 광희문과 서소문 밖에 있는 동활인서와 서활인서에 적절하게 배정해 구료 업무를 맡겼다. 이들이 살았던 곳에는 활인새 뒤골, 신당동(神堂洞), 무원교(巫院橋) 등 지명이 남아있다.
무녀들은 활인서가 폐지될 때까지 무보수로 환자들의 구료·구휼활동을 책임지고 활인서 운영에 필요한 재원을 무세(巫稅)의 형태로 상납했다. 무녀들은 무의(巫醫)로 활동하는 한편, 가난한 자를 대상으로 하는 치료하는 구료활동을 주로 담당했다.
활인서는 전적으로 무녀들의 활동과 세금으로 운영되는 기관이었다. 그동안 음사(陰祀)의 대상으로 인식되어온 무녀를 의료 및 사회복지 업무에 종사한 한양의 여성 전문직업인으로서 재조명하는 성과가 본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한양은 유교적 통치 질서를 천명한 조선왕조의 수도이지만, 도성 안에는 대규모 사찰인 흥천사・흥덕사・원각사 등이 있었다. 도성 밖에도 다양한 암자와 사찰이 조선시대 내내 유지됐다.
이곳들은 왕실 여성과 양반 사대부가 여성들의 발원처이자 치유의 공간이 됐다. 한양도성 안의 비구니절 정업원, 자수원, 인수원은 조선 전기 왕과 사별한 왕실여성이나 역모에 연루된 집안의 여인과 늙은 상궁들이 거처가 되기도 했다.
임진왜란 이후 불탄 전국 사찰을 중수하고 불상과 불화를 제작하는 과정이 100년 넘게 이어졌으며, 왕실에서 상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여성 시주자가 등장했다. 이는 시주자가 왕실 중심인 조선 전기와는 다르게 여성 전 계층으로 확대된 것을 의미한다. 여성이 사찰 재건의 주요한 주체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왕의 왕비의 수복(壽福), 남편과 자식 등 가족의 번영과 다복, 죽은 가족의 극락왕생을 기리는 발원을 주로 했지만, 여성으로서의 현재 고된 삶을 극복하기 위한 ‘남성으로의 환생’ 기원도 특히 한양과 근교 사찰에서 다수 등장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