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아시아 순방을 통해 인도태평양에서 대중국 포위망을 과시하자 중국이 미국의 ‘텃밭’인 남태평양으로 달려갔다. 중국은 남태평양 국가들과 안보 및 경제 협력을 강화하면서 미국을 자극하고 있다. 남태평양은 왜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을까.
왕이 중국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은 26일부터 20명의 사절단을 이끌고 남태평양 8개국 순방에 나섰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한국과 일본을 차례로 들러 대중 견제 협력을 과시하고 떠난 직후다.
열흘 일정으로 진행되는 이번 순방에서 왕이 부장은 남태평양 국가들과 경제 및 안보를 포함하는 포괄적 협정 체결을 추진하고 있다. AP통신이 입수한 협정 초안에는 중국의 수백만 달러 규모 지원, 중국과 남태평양 국가 간의 FTA 전망, 중국 시장에 대한 접근권 제공, 안보 협력 등의 내용이 담겼다.
지난달 중국은 남태평양의 작은 나라 솔로몬제도와 안보협력을 맺었다. 중국이 맺은 안보협력의 핵심은 중국 군대의 파견 가능성을 열어뒀다는 점이다. 중국 해군 함정은 평화유지 의무라는 명분 아래 솔로몬제도가 요청할 경우 항구에 기항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중국이 솔로몬제도에 영구 주둔할 수 있는 길을 텄다는 평가가 나온다. 왕이 부장의 이번 순방은 이 같은 중국의 영향력을 남태평양 다른 도서국가로 확대하려는 포석이 담겨 있다.
중국은 오랜 기간 물량 공세를 통해 남태평양에 공을 들여 왔다. 남태평양 도서국가에 대한 중국의 직접 투자 규모는 2013년 9억 달러에서 2018년 45억 달러로 400% 증가했다. 중국 기업들이 광산에 쏟아 부은 돈만 20억 달러가 넘는다. 중국은 특히 어업, 양식업, 항만 건설 등에 강한 관심을 보였다. 2010년부터 2020년까지 중국과의 수산물 무역은 3500만 달러에서 1억1200만 달러로 대폭 증가했다.
외교 관계도 격상시켰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집권 이후 남태평양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대폭 확대했다. 8개 국가와 외교관계의 최상위 단계인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고 있다.
중국이 남태평양에 집착하는 배경에는 우선 ‘일대일로’가 자리하고 있다. 일대일로는 중국-중앙아시아-유럽을 연결하는 육·해상 실크로드 프로젝트로, 중국의 거대 경제권 구상이다. 중국은 남태평양 일대를 일대일로의 중요한 구성 요소로 보고 있다. 특히 아시아와 중남미를 연결하는 이른바 항공 실크로드의 주요 허브로 낙점했다. 중국은 외교 관계를 수립한 남태평양 도서 국가와 모두 일대일로 협력을 맺었다.
중국이 민감해하는 대만 문제도 엮여 있다.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남태평양 국가들 가운데 대만과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국가는 4개로 줄었다.
무엇보다 중국이 미국에 맞서 해상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교두보 역할을 할 가능성이 크다.
중국의 남태평양 영향력 확대는 미국과 지역 동맹들에겐 도전이다. 남태평양은 오랜 기간 미국의 앞마당이었다. 1954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남태평양을 ‘미국의 호수’라 부르며 전략적 이익을 강조했다.
현재 미국은 인도태평양 사령부를 통해 남태평양에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다. 인도태평양 사령부는 5개 항모전단, 약 37만5000명의 병력, 항공기 2460대, 해군 함정 200척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이 남태평양에 군사기지를 구축해 영구 주둔할 경우 미국의 방어 전략을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 특히 중국의 대만 위협 관련 미국의 비상계획에 차질이 불가피하다.
전문가들은 중국의 영향력 확대는 미국과 동맹, 그리고 중국 간 충돌 위험을 키운다고 평가한다. 호주 싱크탱크 로이연구소의 태평양 외교정책 전문가 미하이 소라는 “중국이 역내 안보 세력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야망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지적했다. 뉴질랜드 캔터베리대학의 앤 마리 브래디 정치교수는 “미국을 역내에서 밀어내고 호주와 뉴질랜드를 고립시키려는 포위 움직임”이라고 우려했다.
마음이 급해진 호주는 새로 임명된 페니 웡 외교장관을 피지로 급파해 관계 다지기에 나섰다. 웡 장관은 이날 피지에서 “태평양 도서국가들과 협력을 강화해 더 강한 지역을 건설할 준비가 됐다”고 강조했다.
미국이 미래 단 하나의 중요한 지역으로 꼽고 있는 인도태평양에서 대중국 포위망을 구축하고, 이에 맞서 중국이 남태평양 진출에 속도를 내면서 태평양이 뜨거운 격전지로 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