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시장 신뢰 회복 위해 필요한 결정" VS "인플레이션 해결이 우선"
"시장 유동성 위험 전이ㆍ흑자도산 막는다면 금리 인상 부작용 보완하는 조치 될 수도"
한국은행이 올해 한 번 더 '빅스텝'(기준금리 0.50%포인트(p) 인상)을 밟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한은의 인플레이션(물가상승) 억제책이 최근 정부의 유동성 지원책과 상충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된다.
3일 금융시장에 따르면 지난달 '레고랜드' 사태로 시장의 불안이 커지자 정부는 '50조 원+α'의 시장 유동성 공급대책을 발표했다. 1일에는 5대 금융지주회사가 자금시장의 경색을 완화하기 위해 95조 원 규모의 유동성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한은이 이달 금통위에서 기준금리를 큰 폭으로 인상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특히 미국 연방준비제도(Fedㆍ연준)가 2일 '자이언트스텝'(기준금리 0.75%포인트(p) 인상)을 밟아 한미 기준금리 차이가 1%p 벌어지면서 한은의 빅스텝도 유력해졌다. 미국과의 금리 차이를 방치하면 외국인 투자자금이 빠져나가고 원화 가치가 떨어져 물가 상승이 심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건형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 결과 최종 금리가 5%로 상향될 것으로 보여 11월 금통위의 50bp(1bp=0.01%p) 인상 가능성은 여전히 높다"며 "한미 금리차를 관리하기에는 지금이 적기"라고 내다봤다.
금융시장에서는 정부와 금융업계가 대규모 유동성 지원책을 내놓은 상황에서 한은이 큰 폭으로 금리를 인상하게 되면 물가를 잡기 위한 기준금리 인상 효과가 떨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예컨대 정부 유동성 지원의 일환인 LCR 규제비율 정상화 유예, 예대율 규제 완화 등에 따라 은행의 대출 여력이 커지면 시중에 통화량이 증가할 수 있다. 이는 기준금리를 올려 인플레이션을 완화하고자 하는 한은의 기조와 배치된다. 한쪽에선 돈줄을 강하게 막고, 한쪽에선 대규모로 풀어주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서로 엇갈린 평가를 내놨다. 정중호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소장은 정부의 유동성 지원이 시장의 신뢰를 되찾기 위해 지금 시점에서 필요한 결정이라고 봤다.
정 소장은 "시장의 불안이 커져 유동성이 위축되면 멀쩡한 기업들이 흑자도산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며 "(레고랜드 사태 등) 신뢰를 훼손하는 이벤트에 대해 정부가 신속하게 대응하는 게 맞다고 본다"고 했다.
이어 "'95조 원 규모 지원을 당장 집행하겠다'라는 의미보다 '이 정도로 뒷받침할 수 있는 여력이 되니 안심해라'라고 시장을 안심시키고 신뢰를 되살리려는 의미가 더 크다"면서 금리 인상기에 유동성 지원책을 발표하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반면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물가 상승 문제 해결을 우선순위에 둬야 하는 상황에서 정부의 유동성 지원안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봤다. 강 교수는 "(정부의 '50조 원+α' 등) 거시적인 신용공급 방안은 인플레이션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 된다"며 "어려운 중소기업들에 맞춤형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어 "한은은 레고랜드 사태 등 시장의 일부 문제가 아닌 국가 경제 전체의 차원에서 기준금리를 결정해야 한다"며 "물가 상승 문제부터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유동성 지원을 실제 어떤 방식으로 실천하느냐에 따라 금리 인상과 상충되지 않을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부가 부실기업이 아니라, 재무구조상 흑자가 나는데도 시중에 자금이 없어서 어려움을 겪는 기업의 도산을 막으려 유동성 지원을 하는 것이라면 (금리 인상에)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하는 미시적 조치라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시장 유동성 위기의 확산을 막고 빠른 금리 인상 속도에 따른 경기 침체 부작용을 보완하는 조치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한편 금융지주사들이 시장에 유동성 공급을 얼마나, 어떻게 할지에 대한 세부 계획은 아직 발표되지 않았다. 금융위 측은 유동성 지원안이 아직 '잠정적인 계획'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금융위 관계자는 "1일 발표된 금융지주사들의 95조 원 규모 지원안의 경우 일부 증안펀드, 채안펀드는 정부가 기존에 발표했던 지원책과 겹치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면서 "지주사에서 자율적으로 실행하는 것이다 보니 규모를 확정적으로 공식화하기 어렵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