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좌 제공을 제안 받은 A 씨는 계좌번호를 알려준 후 약 20일간 보이스피싱 피해자들이 총 304회에 걸쳐 A 명의 계좌로 송금한 6억1335만 원을 보이스피싱 조직원이 지정한 다른 계좌로 이체했다.
이에 B 씨는 계좌번호를 알려주고, 보이스피싱 피해자가 B 명의 계좌로 송금한 560만 원 가운데 440만 원을 보이스피싱 조직원이 지정한 계좌로 이체했다.
최근 보이스피싱 조직이 “단순 환전, 탈세 등에 이용하겠다”고 하면서 개인명의 통장 계좌를 넘겨받아 범죄에 악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대법원은 지난달 27일 “타인의 탈법적인 일에 이용될 수 있도록 계좌를 제공하기만 해도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이하 금융실명법) 위반 방조가 성립한다”는 취지로 유죄를 선고했다.
금융실명법 제3조 제3항과 제6조에 의하면 ‘탈법행위’를 하고자, 타인 명의로 금융거래를 하는 사람에 대해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하도록 하고 있다.
26일 대검찰청에 따르면 모르는 사람이 보이스피싱에 사용하려는 사실을 숨기고 △무등록 환전 △세금과 관련된 사유 △인터넷 도박 등에 사용한다고 해서 금융계좌를 빌려주게 되면, 계좌 명의인이 보이스피싱 범죄임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더라도 형사 처벌될 수 있다.
이 같은 금융거래에 계좌를 빌려주면 ‘탈법행위’를 목적으로 타인 명의 금융거래 행위를 도와준 꼴이므로 금융실명법 위반 방조죄가 성립한다.
계좌 명의인들이 보이스피싱 범행을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무등록 환전 등’ 목적으로 제공한 계좌들이 보이스피싱에 악용되며 많은 피해자들이 발생하고 있다. 대법원은 계좌가 이용된 탈법행위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 계좌 명의인이 정확하게 알지 못했더라도 죄가 성립한다고 판단한다.
법원은 △무등록 환전 △세금 관련 사유 △도박 등의 탈법행위 목적으로 계좌를 제공한 경우 계좌 명의인들에 금융실명법 위반 방조를 인정하고 있다.
구체적인 사례를 보자.
계좌 제공을 제안 받은 C 씨는 계좌번호를 알려줬고 보이스피싱 피해자가 C 명의 계좌로 송금한 940만 원을 현금 인출한 후 925만 원(수수료 제외)을 현금수거책에 직접 전달했다.
이에 D 씨는 도박사이트 회원가입을 하고 아이디와 비밀번호, 계좌번호 등을 알려줬다. 보이스피싱 조직원이 지정한 현금인출책에게 체크카드 등을 교부한 결과, 현금인출책 등이 D 명의 계좌로 송금된 보이스피싱 피해금을 인출했다.
대검은 “보이스피싱 조직이 주로 이런 탈법행위에 이용하겠다며 계좌를 빌려달라고 제안하고 있으므로, 모르는 사람에게 계좌번호 등을 알려주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보이스피싱 범죄 정부합동수사단을 구성한 검찰은 허위대출 광고의 규제를 요청한 상태다. 대검은 보이스피싱 조직이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글로벌 플랫폼에 대부업체를 사칭한 허위광고로 피해자들에게 접근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방송통신위원회에 글로벌 플랫폼의 위법한 대부업 광고에 대한 심사 강화 및 적극적인 시정명령 등을 요청했다.
또한 현금인출기(ATM)를 이용하는 ‘무통장 송금’ 요건을 강화했다. 보이스피싱 조직이 ATM 무통장 송금을 이용, 피해금을 총책에게 전달하는 것을 지연하기 위해 실제 주민등록번호 입력 등으로 송금 요건을 강화해달라고 금융위원회 등에 요청했다.
대검 관계자는 “보이스피싱 조직에 대한 엄중한 처벌뿐만 아니라, 국민들이 보이스피싱 범죄에 악용당하지 않도록 허위대출 광고 규제 등 예방을 위한 제도 개선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박일경 기자 ek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