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작별하며 ‘디지털 디톡스’…전화·TV·인터넷 없는 숲속 선마을로
코로나 시대에 접어든 지 벌써 3년. 바이러스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은 사라지고 우리는 어쩔 수 없는 공존을 준비하고 있다. 세상은 이제 팬데믹(대유행)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완전히 뒤바뀌었다.
어쩌면 더욱 각박한 삶이 될지 모를 새해를 앞두고 올해를 정리하고 싶었다. 사실은 꽤 지친 심신을 달랠 시간이 필요했다. 서울 시내에서 두 시간 정도를 달려 강원 홍천군 ‘힐리언스 선마을’로 향했다. 자연과 어우러진 ‘의도된 불편함’을 느끼며 힐링할 수 있다는 곳이다.
◇‘디지털 디톡스’가 가져다준 자유 = 선마을에 들어서는 순간 휴대전화의 신호가 사라졌다. 전화·문자·인터넷, 무엇 하나 할 수 없단 의미다. 이렇게 된다는 걸 미리 듣긴 했지만 생경한 기분이었다. 손에 들린 스마트폰은 이제 커다란 시계가 됐다.
한 글로벌 IT기업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은 평생의 34년을 인터넷 사용에 할애하고 있다. 미국인보다는 13년, 일본인보다는 무려 23년을 더 쓴다는 것이다. 한국인 기대수명이 83.5년이란 점을 고려하면 일생의 40%를 온라인 공간에 바치는 셈이다.
기자 역시 마찬가지다. 노트북, 태블릿, 스마트폰… 기기만 바뀔 뿐 눈을 떠서 잠들 때까지 온라인에 매여 있다. 쉴 새 없이 연락을 받고, 보내고. 가끔은 ‘카톡’하고 울리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기도 했다.
카카오톡은 한 사람당 하루 평균 72회 실행된다고 한다. 한국인이 가장 많이 쓰는 애플리케이션(앱)이다. 지난 10월 데이터센터 화재로 카카오톡이 멈추자 전국은 ‘카톡 대란’에 휩싸였다. 불과 10여 년 만에 메신저 앱 하나에 우리 생활을 얼마나 의존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던 사고였다.
하지만 선마을에는 인터넷은커녕 TV와 라디오조차 없다. 디지털과 미디어의 홍수 속에 홀로 남은 숲속의 섬이다. 이곳에서는 전해야 할 말을 게시판에 손글씨로 남긴다. “○○아, 오후 5시에 천지인 광장에서 보자.” 또박또박 눌러 쓴 글자가 정겨웠다.
‘디지털 중독’이 유행하면서 ‘디지털 디톡스(Digital Detox)’란 용어도 생겨났다. 단어 그대로 디지털에 빠진 몸과 마음을 해독한다는 뜻이다. 기자에게도 1박 2일간 각종 전자기기의 사용을 멈추고, 명상이나 독서 등으로 갖는 자신만의 시간을 통해 그동안 쌓인 디지털 독소를 빼내란 처방전이 나왔다. 이제 온전히 아무하고도 연결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편이 홀가분했다.
◇자연 속에서 느긋한 테라피 = 도시에 있을 때 누리던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시간이 더디게 흘러갈 것 같지만, 산과 숲에 둘러싸인 선마을에서는 생각보다 할 일이 많았다. 짐을 풀고 커다란 마을을 구석구석 둘러본 기자는 일정이 정해진 ‘숲 테라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모임 장소인 트래킹 코스 입구에는 10여 명이 먼저 와 있었다. 안내를 맡은 숲 해설가 선생님을 따라 숲으로 들어갔다. 겨울이라 잎을 벗어던진 나무들이 빽빽한 숲에서 기분 좋은 공기가 느껴졌다. “선마을의 가장 큰 선물은 숲”이란 선생님의 말에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름드리 나무에 몸을 맡기니 은은한 바람 소리와 멀리서 들리는 새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한참 동안 든든하게 기자를 받쳐주던 나무를 껴안자 신기하게도 온몸의 긴장이 풀리고 편안해졌다. 딱딱하기만 할 것 같던 나무는 겉껍질이 층을 이뤄 푹신한 느낌마저 들었다.
얼마간 몸을 움직였으니 저녁식사가 기대됐다. 식사공간의 이름은 비움과 채움, ‘비채 레스토랑’이다. 강원도에서 자라난 푸릇한 쌈채소가 한눈에 봐도 먹음직스러웠다.
눈길을 끄는 것은 모든 식탁 위에 하나씩 올려진 모래시계였다. 30분짜리다. ‘빨리빨리’가 몸에 밴 한국인의 평균 식사 시간은 약 10분이다. 한 번 천천히 먹어보자고 다짐하며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평소 챙겨 먹기 어려운 여러 가지 쌈 채소를 즐겨서인지 얼추 비슷하게 식사를 마쳤다. 몇 시간 만에 건강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해가 완전히 저문 선마을에는 조금씩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통창으로 넓은 뜰이 내려다보이는 G.X룸에서 폼롤러를 이용해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소도구 테라피’ 시간이다.
추위에 움츠렸던 몸을 구석구석 누르고 문지르고 잡아당겼다. 여기저기서 ‘끙’하고 앓는 소리가 들렸다. 물론 기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태어나서 처음 해본 목공 체험은 기대 이상의 쏠쏠한 재미가 있다. “취미로 삼아 볼까?” 서투르지만 견본과 모양새는 얼추 비슷하게 깎은 나무를 하염없이 사포질하면서 무념무상에 빠져들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윤을 낸 나무는 그럭저럭 볼만한 와인 트레이가 됐다.
◇누구나 일상에 필요한 ‘쉼표’ = 배정받은 숙소는 비탈길 꼭대기에 있다. 오르고 내리기 힘든 만큼 숲에 둘러싸여 전망이 좋았다. 비채 레스토랑까지는 비탈길을 약 15분 정도 내려가야 하는 위치라, 식사 전후에 약간의 각오가 필요했다.
만보기 기능이 남은 스마트폰에는 1만2415보가 찍혀 있었다. 사실 1만 보는 취재하러 다니다 보면 도심에서도 쉽게 넘을 수 있다. 하지만 서울 도심의 녹지 비율은 3.7%, 고궁 면적까지 합쳐도 8.5%에 불과하다. 종일 걸어도 흙길을 밟을 일이 없는 곳을 1000만 명이 분주하게 오간다.
오늘의 1만 보는 낙엽이 쌓인 비탈길을 몇 번이나 오르내리고 흙내음을 맡으면서 얻은 걸음이다. 평소에 워낙 운동하지 않아서인지 뜨뜻한 방에 들어오자 다리가 뻐근했다. 그와 동시에 슬쩍 뿌듯함이 밀려왔다.
선마을은 자정에 소등한다. 드문드문 켜진 가로등도 없이 완전한 산속의 어둠에 휩싸이는 것이다. 부러 자정까지 기다렸다 테라스에서 빼꼼 고개를 내미니 흐린 하늘에도 수많은 별이 보였다. 아주 오래전 배운 기억을 더듬어 겨울철 별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캄캄한 밤, 인공조명에 둘러싸인 서울에선 볼 수 없는 밤이었다.
잠자리는 진공관 속에 들어온 것처럼 적막했다. 약간의 불면증을 앓는 기자가 잠을 청하기 더없이 좋은 환경이다. 이불에 들어가 눈을 감자 거짓말처럼 잠이 밀려왔다.
도심 속 우리는 늘 무언가 하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에 쫓기며 살아간다.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상이 된 거리두기로 오프라인 만남은 줄어들었지만, 카카오톡이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등 온라인으로는 촘촘히 연결됐다. 이런 환경에서 오롯이 자신에게만 집중할 틈을 갖기는 쉽지 않다.
최근 보건복지부의 조사에서는 한국인 4명 중 1명이 우울감이나 불안 등 정신장애를 겪고 있단 결과가 나왔다. ‘잘’ 살기 위해서는 일부러라도 바쁜 삶에 쉼표를 찍는 시간이 필요하다. 눈이 펑펑 내리는 선마을을 뒤로 하며 다시 올 수 있길 기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