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07% 훌쩍 ‘IMF 데자뷰’
10대그룹 2곳, 부채비율 200% ↑
기업대출 1189조…3개월째 증가
업황 부진에 높은 이자로 ‘이중고’
한국은행에 따르면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신용의 비율은 지난해 3분기 105.4%에서 4분기 104.7%로 떨어졌지만, 기업신용의 비율이 119.3%에서 120.4%로 높아졌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107%)보다도 높은 수준이다. 국내 기업들의 부채는 늘고 있지만, 상환 능력이 떨어지면서 영업이익으로 이자조차 내지 못하는 한계기업이 급증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좀비기업 펜데믹’(범유행) 경고등이 켜졌다.
국내 10대 그룹 상장사 10곳 중 2곳의 부채비율은 200%를 넘어섰다. 빚이 회사가 보유한 자본보다 두 배 많다는 의미다. 일반적으로 100% 이하를 표준비율로 보고 있는데, 선진국에서는 200% 이하 업체를 재무구조가 우량한 업체로 간주한다.
최근 한국거래소가 10대 그룹(삼성, SK, 현대자동차, LG, 롯데, 포스코, 한화, GS, 현대중공업, 신세계) 상장사 106곳의 2022년도 사업보고서상 별도 재무제표를 분석한 결과 부채비율이 1년 전보다 높아진 곳은 56곳으로 절반에 달했다. 특히, 10대 그룹 계열 상장사 중에서 부채비율이 200%를 넘는 기업은 21곳으로 집계됐다. 비율로 계산하면 19.8%다.
부채비율이 가장 높은 곳은 한화손해보험으로 별도 기준 부채비율이 작년 말 8030.90%로 전년(1260.45%)보다 6배 증가했다. 같은 기간 한화생명의 부채비율은 1170.96%에서 1907.45%로 높아졌고, 삼성생명은 808.33%에서 1491.60%로 증가하며 부채비율 1000%를 넘어섰다. 이 밖에 삼성화재(703.11%), 삼성증권(697.84%), 현대차증권(675.49%), 한화투자증권(600.93%) 등의 부채비율도 600%를 웃돌았다. 금리 인상으로 채권 평가손실이 확대되며 금융회사들의 부채비율이 크게 늘었다.
금융회사를 제외한 비금융권 업종들의 부채비율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SK렌터카의 부채비율은 작년 말 544.45%로 500%를 넘겼고, 롯데렌탈은 449.33%에 달했다. 호텔신라(361.18%)는 300%를 웃돌았고, LG디스플레이의 부채비율은 1년 전 176.98%에서 작년 말 298.06%로 1.7배 증가했다. 이 밖에 신세계건설(265.01%), 한화에어로스페이스(227.37%), 현대로템(219.40%) 등도 부채비율 200%를 넘겼다.
기업들의 부채 증가는 은행권의 기업대출 현황에서도 확연하게 나타난다. 한은이 10일 발표한 ‘금융시장 동향(2023년 3월)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달 기업대출은 전월 말 대비 5조9000억 원 증가하며 3개월 연속 증가했다. 이는 통계 작성 이후 3월 증감액 기준 세 번째로 큰 수치다. 3월 말 기준 기업대출 잔액은 1189조3000억 원으로 집계됐다. 부문별로 보면 대기업 대출은 전월(9000억 원)보다 증가 폭이 둔화하며 1000억 원 늘었고, 중소기업대출 증가 폭은 5조8000억 원으로, 전월(4조3000억 원)보다 확대됐다.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기업대출 잔액은 지난달 말 기준 710조9236억 원으로 한 달 전보다 3조7512억 원 늘었다. 지난해 말(698조2971억 원)과 비교해선 3개월 만에 12조6265억 원 증가했다.
한은은 “원자재가격 상승, 대기업 중심의 대출 수요 지속 등으로 기업대출이 높은 증가세를 유지했다”며 “대기업대출은 분기 말 재무비율 관리를 위한 대출 일시상환 등으로 증가 폭이 둔화했고, 중소기업대출은 은행들의 대출 확대 노력, 법인세 납부 자금수요 등으로 증가 폭이 확대했다”라고 설명했다.
빚이 늘어도 매출이나 영업이익이 그만큼 증가하면 문제가 없다. 다만, 최근에는 상황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문제는 고금리 여파에 빚에 허덕이기 시작한 기업이 느는 추세라는 점이다.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양적완화와 잇따른 긴축은 기업들의 이자비용을 대폭 증가시켰다. 코로나19를 겪으며 낮췄던 기준금리는 2021년 8월을 시작으로 0.75%에서 3.50%로 가파르게 치솟았다.
기업분석연구소 리더스인덱스에 따르면 매출 상위 500대 기업 중 사업보고서를 제출한 377개 기업의 지난해 이자 비용은 39조9166억 원이었다. 이는 전년(26조5773억 원)보다 50.2%나 증가한 것이다. 고금리 압박에 이자비용은 늘었지만, 경기 위축 여파에 실적은 줄었다. 이들 기업의 지난해 영업이익은 170조3208억 원으로 전년(207조4683억 원) 대비 17.9% 감소했다.
삼성전자의 지난해 이자비용은 7145억 원으로 전년 4344억 원 대비 64% 늘었다. 증가 폭은 컸지만, 그나마 삼성전자의 경우는 양호하다. 덩치 큰 기업 상당수가 2조 원이 웃도는 이자비용을 지난해 지불했다. 현대차의 지난해 이자비용은 2조6950억 원으로 전년(1조9059억 원)보다 41.4% 증가했다. 한국전력공사(2조5177억 원·전년 대비 30.6%↑), SK(2조1411억 원·48.4%↑) 등도 2조 원 이상 이자비용을 낸 것으로 나타났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코로나19로 기업부문 전반의 재무성과 지표가 모두 악화했다. 2020년 기준 부도확률 최상위 그룹의 평균 부도확률은 11.86%로 2019년 7.39% 대비 크게 증가했다. 이들은 소규모 기업으로 증자와 차입금을 통한 유동성 확보 노력에도 불구하고 보유현금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허약한 기업들에 금융권 문턱은 높다. 1분기 대기업과 중소기업 대출태도지수는 전 분기보다 완화된 각각 6, 11이었다. 대출태도지수는 은행권에서의 대출 동향과 전망을 수치화한 지표로 -100부터 100 사이의 숫자로 나타낸다. 전망치가 -100에 가까울수록 금리, 만기 연장 조건 등 대출 심사를 강화한다는 금융기관이 많다는 것이고 100에 가까울수록 심사를 완화하는 기관이 많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신용위험지수가 25(대기업), 42(중소기업)에 달할 정도로 은행들이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다. 신용위험지수가 0보다 높으면 신용위험이 커질 것이라고 답한 금융사가 그렇지 않은 곳보다 많다는 뜻으로, 대출의 부실화 가능성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은행 금융사 문턱은 더 높다. 1분기 상호저축은행의 신용위험지수는 45, 신용카드회사는 25, 상호금융조합은 51, 생명보험회사는 40으로 우려 수준이다.
강현주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코로나19 감염확산 기간 중 크게 확대된 가계 및 기업 부채가 국민 경제의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전망한다”라며 “저금리에 의존하던 한계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을 독려해 경제 전반의 생산성을 높이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으로 판단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