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다고만 하는 공인중개사, 얼굴 한 번 못 본 바지 건물주, 기약 없는 매각기일과 기다림까지.
마치 샴쌍둥이처럼 전세사기 수법은 소름 돋도록 닮아 있었다. 모든 상황과 절차가 최근 인천 미추홀구와 서울 강서구 일대 세입자를 울린 전세사기와 똑같았다. 다른 점은 시점(時點)뿐. 세입자를 울리는 악성 수법은 이미 과거에도 성행하고 있었다. 본지는 서울 관악구 봉천동 신축 원룸을 계약했다 전세 사기당한 세입자 A씨를 심층 인터뷰했다.
“이제는 화도 안 납니다. 그저 집주인에게 소송 걸어서 인생 조져버릴 생각만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실 돈은 안 받아도 그만입니다. 예전엔 ‘떼인 돈 받아드립니다’도 알아봤는데 부질없는 짓일 것 같고요. 돈보다 소송 걸어서 저도 채권자가 되고 싶네요”
A씨에게 지금 어떤 심정이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지금까지 A씨는 전세보증금을 단 한 푼도 돌려받지 못했다. 지방에서 상경해 어렵게 모은 돈을 한순간에 잃었지만, A씨는 정작 돈을 되찾기보다는 집주인에 대한 강력한 엄벌을 더 원하고 있었다.
A씨는 2019년 4월 서울 관악구 봉천동 한 4층 건물 신축 원룸 전세 계약을 맺었다. 보증금은 6000만 원. 전세자금대출은 한 푼도 들어있지 않았다. 당시 32살이었던 A씨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2023년 7월 현재도 A씨는 이 돈을 단 한 푼도 돌려받지 못했다. 말로만 듣던 전세 사기를 당한 것이다.
돌이켜보니 계약 때부터 이상했다. 공인중개사는 건물에 걸린 수억 원의 융자금에 대한 질문에 문제없다고 했고, 집주인은 얼굴 한 번 못 보고 대리인과 계약서를 작성했다. 이 집주인 뒤에 부동산법인이 있다는 것은 건물이 경매로 넘어간 뒤에야 알 수 있었다. 의심은 갔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집 관리가 잘 됐기 때문이다. A씨는 “그해 여름 에어컨이 떨어졌는데 곧장 수리해 주는 등 의심할 거리가 없었다”고 햇다.
문제는 집값 하락기가 다가온 2021년 터졌다. 한 차례 전세 계약 연장을 결정한 A씨는 그해 8월 법원의 경매 예고 통지서를 받아들어야만 했다. 그는 “서울중앙지법 경매 2계에서 집이 경매로 넘어갔다는 안내장과 권리신청 안내문이 등기로 날아들었다”며 “청구금액은 6억7000만 원, 선순위 채권자는 1금융권 대형 은행이었다”고 했다.
이때부터 집주인과 연락이 끊기고, 건물 관리도 이뤄지지 않았다. 집주인이 청소 업체에 관리비용을 미납해 청소가 안 된 것이다. 건물 내 10가구 남짓한 세입자들은 부랴부랴 단체대화방을 만들고 대응에 나섰다.
A씨 역시 이때 생애 처음으로 법원 문턱을 밟았다. 그는 “2021년 8월 초에 법원 연락을 받은 뒤 광복절 연휴 뒤에 서울중앙지법 경매계를 찾았다”며 “특히 경매계가 법원에서도 제일 안쪽에 있는데 교대역에서부터 걸어가는 그 길이 어찌나 멀게 느껴지는지 지금 생각해도 답답하다”고 토로했다.
A씨는 2021년 여름 경매 진행 통보장을 받아들었지만, 경매는 2023년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세 들어 살던 건물의 첫 매각 기일은 지난해 10월 6일이었고, 한 차례 유찰 끝에 지난해 11월 낙찰됐다. 하지만 집주인과 얽힌 다른 5건의 병합경매가 끝나지 않아 A씨는 단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 다른 5건의 경매가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금으로선 기약이 없는 셈이다.
민사소송을 진행하려 변호사 조언도 받았지만, 경매가 끝나기 전까진 민사조차 진행할 수 없었다. 모든 경매가 끝난 뒤 최종 배당액이 확정돼 본인 손해액이 결정돼야만 민사를 걸 수 있기 때문이다. A씨는 “모든 경매가 끝나야 민사를 진행할 수 있다는 얘길 듣고 전세 사기는 정말 ‘노답’(답이 없다)이란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전세사기로 극단적인 선택을 이어가는 세입자들의 심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A씨는 “불행 중 다행이라는 말을 써도 될지 모르겠지만, 저는 대출도 없었고 지인의 도움으로 곧장 다른 살 곳을 구할 수 있었다”며 “전세 사기로 수천만 원 규모의 대출금을 고스란히 빚지거나, 당장 머물 곳이 없었다면 정말 막막했을 것”이라고 했다.
끝으로 그는 “전세 사기 피해 뒤에 정부 정책도 알아봤지만, 금융지원책이 대부분이라 당장 지낼 곳이 없고, 경매를 빨리 진행해야 하는 상황에선 무용지물”이라며 “정부가 세금으로 직접 보전하는 데는 나도 동의하지 않지만, 실용적인 대책이 필요한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