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 업계 숙원 제도였던 '복수의결권'이 17일 오늘부터 본격적인 시행에 들어갔다. 2020년 논의가 본격화된 지 3년 만이다. 현장에선 제도 활용의 문턱이 너무 높다는 지적지 나오고 있지만, 정부는 제도 시행 초기인 만큼 현장에 안착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출 것으로 보인다.
17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복수의결권은 비상장 벤처·스타트업 창업주에게 1주당 최대 10개의 의결권을 부여할 수 있게 하는 제도다. 창업자가 투자 유치 과정에서 경영권 위협 없이 안정적으로 기업을 운영할 수 있도록 하는 게 핵심이다. 업계에선 경영권 침해나 적대적 인수합병(M&A) 위협을 막을 수 있는, 경영권 방어 장치로 본다.
발행은 비상장 벤처기업에 한정한다. 창업주이면서 현재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에게 발행한다. 발행 대상은 지분을 30% 이상 소유한 최대주주다. 투자 유치 과정에서 이 지분이 30% 아래로 밀리거나 최대주주 지위를 벗어나는 경우 발행이 가능하다. 또 창업 이후 누적 투자 유치액이 100억 원 이상, 마지막 투자가 50억 원 이상이여야 발행할 수 있다.
복수의결권 존속기간은 최장 10년이다. 10년 이후에는 보통주로 전환된다. 만약 상장기업이 되면 존속기한과 상장된 날부터 3년 중 짧은 기간으로 변경된다. 편법 경영권 승계에 악용할 수 없도록 상속·양도, 창업주의 이사직 상실 즉시 보통주로 전환된다. 공시대상기업집단에 편입될 경우 역시 보통주로 전환되고, 주주권익이나 창업주의 사적 이해관계와 관련된 안건에서는 활용이 어렵다. 복수의결권주식이라도 1주당 1의결권만 갖는다.
또 복수의결권 주식을 발행하는 기업은 중기부에 이를 보고해야 한다. 제도가 시행되면 중기부가 관보를 통해 복수의결권주식 발행을 보고한 벤처기업의 명단을 고시한다.
복수의결권 논의가 본격화된 건 2020년 관련 입법이 잇달아 발의돼서다. 올해 제도는 4개의 여야 의원안과 정부안을 병합해 우려를 최소화한 개정안이다.
하지만 개정안은 법사위에 계류돼 있었다. 모태펀드 및 벤처 창업자의 도덕적 해이와 재벌 세습 악용 등 부작용이 적지 않다는 우려 때문이다. 또 창업자의 의결권이 축소되는 일몰조항을 삭제하는 논의가 이뤄질 경우 형평성에 의해 재벌기업에도 복수의결권 주식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반대론에 막혀 있던 복수의결권이 국회 문턱을 통과한 것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벤처투자 시장의 침체로 투자심리가 급격히 얼어붙으면서 가능했다. 올해 2월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파산 사태가 발생하면서 투자난은 더 심화했다. 정부는 '혁신 벤처·스타트업 자금지원 및 경쟁력 강화 방안' 등을 발표하며 분위기 활성화에 나섰다. 복수의결권 통과 역시 경쟁력 강화 방안 중 하나였다.
다만 본회의 통과 당일에도 8명의 여야 의원들이 토론자로 나서 1시간 가까이 찬반 주장을 이어갈 만큼 반대론은 여전했다.
복수의결권은 경영권을 방어하는 안전장치로 불리는 만큼 제도 활용에 대한 기업들의 관심이 많다. 벤처기업협회가 벤처기업 291개 사를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에선 응답 기업의 70.8%가 복수의결권 주식을 발행할 계획이 있다고 답했다. 도입 시기에 대해 절반 이상이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52.4%)고 했지만, 향후 3년 이내(30.1%) 활용하겠다는 답이 많았다. 복수의결권주식 발행 계획이 없는 이유로는 투자 유치 계획이 없다(44.7%)로 높았다.
복수의결권 주식 발행 시 예상되는 어려움으로는 발행요건 충족(31.1%)을 가장 많이 꼽았다. 실제 업계에선 발행요건이 까다롭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특히 복수의결권 주식을 발행하려면 총 100억 원 이상의 투자를 받아야 하고, 마지막에 받은 투자는 50억 원을 넘겨야 하는 점이 지나친 요건으로 지목되고 있다.
한 벤처업계 관계자는 "제도를 도입하고 싶지만, 발행 요건이 너무 까다로워 진입장벽이 높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라며 "발행주식 총수의 4분의 3 이상의 주주가 동의해야 하는데 이것도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직원이 5~6명 수준인 스타트업이 100억 원 넘는 투자 받기란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전날 중소벤처기업부와 벤처기업계가 연 복수의결권 관련 간담회에서 이은청 중기부 벤처정책관은 “모든 요건이 들어간 것은 상법 예외 조항으로 만들기 위해, 또 사회적 합의를 위해 물러설 수 있는 최선의 조건이었다”며 “일단은 제도를 안착시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