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는 15년전 워크아웃에 돌입한 금호아시아나그룹의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 회사채에 투자했다 회수하고 나온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2015년 금호그룹은 채권단에 인수대금을 모두 완납하고 6년만에 워크아웃을 졸업했다. 또한 A씨는 주위에서 2012년 유럽 금융위기 상황에서 그리스 국채에 과감하게 베팅했다 11% 넘게 수익률을 올린 사례도 봤다.
그러나 태영건설이 전날 ‘감사의견 거절’을 받으면서 A씨는 심란함은 깊어지고 있다.
태영건설이 삼정회계법인의 지난해 재무제표 감사 결과 ‘감사의견 거절’을 받고 상장폐지 위기에 처하면서 태영건설에 베팅했던 채권 개미(개인투자자)들의 불안이 현실화됐다. 의견 거절 사유는 ‘계속기업 가정에 대한 불확실성’과 ‘주요 감사 절차의 제약’이다. 특히 지난 1월 개미들이 대거 사들였던 태영건설 68회차 투자자들의 근심이 깊다.
올해 1월 채권시장에서 개미들은 태영건설 68회차의 포식자였다. 1월 둘째주(8~12일) 장내에서 개미들의 태영건설68 거래대금은 40억4867만 원에 달한다. 거래량도 급증했다. 1월 10일 개미들의 태영건설68 회사채 거래량은 31억 원을 넘기기도 했다. 태영건설68은 2021년 발행된 3년 만기 공모채로 올해 7월 만기를 앞두고 있다.
당시 태영건설68은 장내에서 거래가 가능한 유일한 태영건설 공모채였다. 태영건설의 장외거래는 전무했다. 민간 시가평가사 4사는 태영건설이 워크아웃을 신청한 지난해 12월 28일부터 태영건설 회사채에 대한 시가평가를 중단했기 때문이다. 기업 계속성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시가평가를 냈다가 투자자들의 신뢰를 잃게 되고, 보수적으로 평가했다가는 발행사로부터 부정적 이미지를 찍힐 수 있다.
국내 신평 3사는 태영건설의 신용등급을 기존 A-에서 CCC 투기등급으로 일제히 강등했다. 이때 장내에서 거래됐던 공모채는 2021년 공모채 발행 수요예측 총액인수 과정에서 기관들이 시장에 셀다운한 물량을 개인투자자들이 저가매수로 사들인 것으로 풀이된다.
개미들은 액면가 1만 원짜리 채권 가격이 6123.60원으로 떨어진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워크아웃 신청 전까지만 해도 태영건설 68회차는 9500원대에 거래됐으니 35% 넘게 가격이 내려온 셈이다. 상하한가 제도가 존재하는 주식과 달리 채권의 시가폭은 제한이 없다.
태영건설의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이 아때 채권단 동의율 96.1%로 워크아웃을 개시했던 점도 개미들이 태영건설 68회차에 기대를 걸어볼만한 이유였다. 워크아웃 개시에 따라 채권자협의회가 태영건설의 모든 금융채권에 대해 상환을 유예하고, 자산부채실사를 시행하면 만기 상환은 가능하다고 예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워크아웃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윤세영 태영그룹 창업회장이 직접 나서 호소문까지 발표했지만, 채권단은 태영그룹이 정작 중요한 오너일가의 사재 출연이나 SBS 지분 매각 가능성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 강한 유감을 드러내며 회생 의지를 둘러싸고 물음표를 띄웠다.
마지막으로 매매가 가능했던 이달 13일 태영건설 68회차는 6989.40원까지 올랐으나 여전히 7000원도 채 넘기지 못한 상황이다. 태영건설은 14일부터 자본잠식으로 장내거래가 중단된 상황이다. 태영건설은 지난해 사업연도 결산 결과 자본총계가 마이너스(-) 5626억 원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1월에 매수했던 채권을 이달 13일 정리했더라면 약 14% 차익을 남길 수 있었지만, 이때를 맞춰 채권을 정리한 투자자는 많지 않을 것으로 추산된다. 13알 태영건설 거래량은 1992만 원 수준으로 워크아웃 신청 후 일평균 거래량에 한참 못 미치기 때문이다.
워크아웃(기업재무구조개선)을 진행 중인 태영건설은 태영건설 측은 재감사로 상장폐지 사유를 해소하겠다는 계획이다. 유가증권시장 상장 규정에 따르면, 재무제표에 대한 외부감사인 의견 거절은 상장폐지 사유 해당한다. 향후 거래소 심사 결과에 따라 상장이 유지될 수 있으나 최종 결과 나오기 전까지 주식매매는 정지되고 관리종목으로 지정된다.
채권시장 참여자들은 개미들의 태영건설68회차에 투자를 두고 “도박판에 뛰어든 불나방”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태영건설 68회차는 채권 종류 중 선순위 무보증 사채로 채권 순위 기준으로 보면 채무증서보다 후순위에 속한다. 태영건설이 워크아웃을 무사히 졸업하면 원금은 건질 수 있겠지만, 부동산 경기 회복이 어려운 고금리 환경에서 건설사가 파산신청에 들어가더라도 남는게 없다는 분석이다.
한 대형 증권사 채권운용역은 “장내채권은 본인이 직접 거래하는 구조다. 어느 누가 이걸 지켜줄 수 있겠나”라며 “차라리 기관이 거래했으면 담당자가 마이너스 두들겨 맞고 끝나는 문제인데 이건 장내채권으로 본인이 책임을 지는 수 밖에 없다”라며 “태영건설이 재평가를 받는다하더라도 문제가 되는 건은 민간평가사들도 다 기피하는 상황에서 더이상 (채권) 민간 평가의견도 안 낼 것”이라고 했다.
최악의 경우 원금 손실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개미들이 희망을 걸어볼만한 첫 번째 시나리오는 태영건설이 재감사 결과 상장폐지를 면하고 장내 채권 매매거래가 재개되는 경우다. 그러나 이미 워크아웃 불발과 감사의견 거절로 시장 참여자들의 신뢰도에 여러번 타격을 입힌 태영건설을 받아주는 투자자가 나타날 가능성은 희박하다.
오는 7월에 돌아오는 만기에 맞춰 태영건설이 롤오버(채무상환)를 진행하더라도 새로운 채권단이 들어오기는 쉽지 않다. 시장에서 채권 매력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높은 금리를 부르는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태영건설은 이미 자본잠식 상태에 빠져 더 높은 금리를 제시해 자체 상환하기는 어렵다는 판단이다.
채권단 협의에 의해 만기를 향후 1년간 연장하는 방법도 있다. 이 기간 개미들의 원금회수는 상당히 늦춰진다. 채권 만기일이 다시 돌아와도 태영건설의 재무구조 개선이 예상보다 더 오래 걸릴 수도 있다. 앞서 금호아시아나그룹은 6년 만에 워크아웃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