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계속되던 7월의 어느 날, 비가 소강상태를 보일 때마다 야생 너구리가 모여 산다는 서울 양천구의 서서울호수공원을 찾았다. 능골산을 낀 이 공원은 원래 정수장으로 쓰던 땅을 친환경 공원으로 조성해 2009년 개장한 곳이다.
덤불에서 튀어나온 새끼 너구리 한 마리가 기자의 신발 위에서 뒹굴며 애교를 부렸다. 먹을 것을 달라는 모양새다. 너구리는 잡식성이다. 산에서라면 쥐·곤충·열매 등을 먹었겠지만 이곳에선 사람이 주는 사료와 간식을 먹는다.
생태계 파괴로 기존 서식지에서는 먹이를 구하기 어려워졌지만, 도심에서는 인간의 개입으로 굶주리지 않을 수 있게 됐다.
너구리는 적응력이 뛰어나다. 도심으로 내려오는 너구리 개체 수는 계속해서 늘어나는 추세다. 서울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6∼10월 서울 은평구 녹번동, 강남구 대모산, 중랑구 봉화산, 성동구 서울숲 등 59개 지역에 센서 카메라 203대를 설치해 관찰한 결과 25개 자치구 중 24개 자치구에서 너구리가 포착됐다. 서울야생동물구조센터가 구조한 너구리도 2018년 49마리에서 작년 80마리로 63.3% 증가했다.
국립생물자원관 야생동물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산지와 구릉의 너구리 서식밀도는 2018년 1㎢당 3.3마리에서 작년 1㎢당 2.8마리로 줄어들었는데, 개체 수가 일정하다고 가정하면 일부 너구리가 산지와 구릉에서 도시로 넘어왔다는 뜻이 된다.
이곳을 터전으로 삼은 너구리는 어림잡아 10여 마리 이상이다. 야행성인 너구리들은 공원 곳곳에 보금자리를 만들어 낮엔 주로 휴식을 취하고 밤에 먹이를 구하러 돌아다닌다.
서서울호수공원엔 길고양이들도 모여 산다. 너구리는 너구리대로, 고양이는 고양이대로 각자의 구역에서 삶을 이어간다. 서로의 먹이를 노리는 ‘전쟁’ 같은 위험은 감수하지 않는다. 공급원이 다양하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듯했다.
너구리는 경계심이 없고 호기심이 많다. 이곳에서 자란 너구리들은 사람을 피하지 않는다. 렌즈를 가까이 대자 도망은커녕 코앞까지 다가왔다.
이런 성격 탓에 누군가에겐 관심을, 누군가에겐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다. 지역 주민들은 너구리들이 익숙한 듯했다. 기자를 만난 한 60대 주민은 “(너구리를 본지) 몇 년 됐다”면서 “밤에 산책을 하다보면 너덧 마리는 만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너구리는 엄연한 야생동물이다. 감염병 전염이나 물림 등 사고에 대한 경각심도 가져야 한다. 전문가들은 안전을 위해 너구리와 접촉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하지만 마냥 너구리를 혐오의 대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서울시는 2006년부터 매년 봄과 가을, 너구리 등 야생동물용 광견병 미끼 예방약을 살포하고 있다. 살포 이후 현재까지 서울에서 야생동물로 인한 광견병이 발생한 사례는 없다.
은신처가 다양하고 먹이를 구하기가 쉬운 공원은 너구리가 머물기 알맞은 곳이다. 추세대로라면 이곳뿐만 아니라 ‘길고양이’처럼 ‘길너구리’를 도심에서 흔하게 마주할 수도 있다. 너구리들이 야생성을 유지하며 인간과 공존할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