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가 임차인이 계약 만료 하루 전에 가게를 뺀다고 해도 계약 해지가 인정된다는 법원의 판단이 나오면서 부동산 업계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관련 사례가 늘어나면 새로운 임차인을 구할 때까지 상가를 비워놔야 하는 등 임대인의 부담이 가중될 수밖에 없고 상가 임대 시장의 선순환이 깨질 수 있다는 점에서다. 법원의 판단이 통상의 관례를 완전히 벗어나 임대인과 임차인 간 분쟁을 확대할 것이란 관측도 제기된다.
23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1부는 최근 임차인 A씨가 임대인 B 씨를 상대로 임대차 보증금을 돌려달라며 낸 소송에서 임차인의 갱신거절 통지 기간은 제한이 없다는 취지로 판결했다. 계약 만료 하루 전이라도 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면 효력이 인정된다는 것이다.
A 씨는 B 씨의 상가 점포를 2018년 12월 31일부터 2020년 12월 30일까지 보증금 3000만 원, 월세 180만 원에 빌렸다. 이후 A 씨는 2020년 12월 29일 B 씨에게 계약 갱신을 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하지만 B 씨는 계약 만료일 1개월 전까지 갱신 거절 의사를 밝히지 않아 묵시적 갱신이 이뤄졌다며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았다. 이에 A씨가 소송을 냈다.
1·2심은 묵시적 계약 갱신이 인정된다며 계약 거절 통지일로부터 3개월 후 효력이 발생한다는 점에서 B씨가 보증금에서 석 달 치 월세를 제외하고 돌려주면 된다고 했다.
부동산 시장 전문가들은 대법원의 이번 판결이 상가 임대차 시장의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송승현 도시와경제 대표는 "상가는 상권 분석 등을 위해 여러 차례 둘러보기 때문에 계약까지 가는 기간이 주택보다 오래 걸리는데 계약 만료가 임박해 해지되면 임대인은 오랜 시간 상가를 비워둘 수밖에 없고 급하게 임차인을 구하려면 임대료를 낮춰야 해 금전적 손해가 불가피하다"며 "임대인에게 과도한 부담을 주는 결정"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같은 사례가 계속 발생한다면 공실 없이 임차가 꾸준히 이뤄지는 순환구조를 깨뜨려 공실을 유발하고 상권에 악영향을 미치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최근 경영악화로 문을 닫는 사업자가 크게 증가하는 상황을 고려하면 최대한 버티다가 계약 만료가 임박한 시점에 갑작스럽게 가게를 비우겠다는 뜻을 밝히는 임차인이 빠르게 늘어날 수 있다.
국세청 국세 통계를 보면 지난해 폐업 신고를 한 사업자(개인·법인)는 98만6487명으로 2006년 관련 통계 집계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고금리 장기화와 내수 부진의 영향으로 인한 영업자·소상공인의 위기 상황이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이상혁 더케이컨설팅그룹 상업용부동산센터장은 "성수동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상권이 침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그나마 상황이 낫다는 상권에서도 권리금만 건질 수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상인들이 많다"고 설명했다.
대법원의 이번 결정이 임대차 시장의 분쟁을 크게 확대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인만 김인만부동산연구소장은 "통상 2개월 정도 전에는 계약 갱신 여부를 협의하는 게 상식이었고 대화를 통해 조율하는 게 보통의 방식이었는데 이제는 임차인이 하루 전에 통보해도 괜찮다는 판례가 나왔으니 이를 근거로 '법대로 하자'고 하는 일이 많아지지 않겠냐"며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법원의 판단이 싸움을 조장하고 부추기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소송전이 벌어지면 장기전이 되고 새로운 임차인을 들이기도 쉽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며 "결국 임대인, 기존 임차인, 장사를 시작하려는 예비임차인 모두에게 피해가 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만 상가 임대차 시장에 큰 영향이 없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엄정숙 법도 종합법률사무소 변호사는 "묵시적 계약 갱신에 관한 분명한 기준이 마련됐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며 "임대인들이 계약 만료 전에 임차인의 의사를 명시적으로 확인한다면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