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7일. 기자는 재난상황을 맞았다. '통장 잔고 1782원'. 이투데이의 월급날은 3일 뒤인 10일이다.
부장이 오래 전부터 기자에게 제시했던 콘텐츠 하나가 있었다. 바로 재난 발생 시에 먹는 비상식량, 정식 명칭 ‘이머전시레이션’(이하 재난식량)만을 먹으며 이틀을 버텨보라는 것.
"우리나라도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잖아. 생존배낭을 가정마다 준비해야 한다는 말도 많고 말이지. 근데 생존배낭의 필수품인 재난식량을 먹어본 사람은 그리 없단 말이지? 이틀 동안 버텨본 사람은 아예 없을 거고?"
아니 근데…재난식량을 먹어보면 먹는거지, 그걸 하필 12월 24~25일에 해보자고 제안할 건 또 뭔가?(극적인 기사가 될 것이란 이유였다.) 어이없는 부당지시에 잠시 고용노동청으로의 신고를 진지하게 고려했었다. 근데 상황이 바뀌어서 이젠 그거라도 사달라고 해야할 정도의 자금난을 겪게 되고 말았다.
떨어진 것은 자금 뿐이 아니었다. 실은 기사 아이템을 떠올리는 것도 한계에 다다른 상황이었다. 돈과 아이디어 모두 고갈, 이틀 동안 회사에서 사주는 식량을 먹으며 기사 한 건 쓰기…득실판단은 끝났다.
“부장…저, 지금이라도 그 재난식량 사주시면….”
체험은 1월 8~9일 이틀간 진행됐다. 8일 0시부터 시작해 9일 자정에 체험 종료. 진짜 재난상황을 맞았다는 가정 하에 재난식량 외 어떠한 유형의 식품 섭취도 금지. 마실 것은 생수만 허용하고 커피나 녹차를 포함한 어떠한 음료도 마시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맞은 8일 아침 8시 30분. 출근해서 재난식량을 처음 한입 베어물자마자 들었던 생각.
‘아, 괜히 나댔다’
◇이머전시레이션 'NRG-5'는 이런 식품
체험에 쓰인 재난식량은 ‘NRG-5’라는 독일산 제품이었다. 각 재난식량 블럭은 가로 7cm, 세로 5.5cm, 높이 1.4cm이며, 1만9000원 한 세트에 9개의 블럭이 들어있다. 재난식량답게 유통기한은 2039년 2월까지로, 지금부터 20년간 보존이 가능했다.
1세트에 든 9개 블럭을 모두 섭취하면 열량은 총 2300kcal. 성인 권장칼로리는 남성 2500kcal, 여성 2000kcal로 알려져 있으니, 이 한 세트가 하루치 분량이다.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등은 물론, 비타민 A‧D‧E‧C, 칼슘, 칼륨, 마그네슘, 철분 등 인간 생존에 필요한 대부분의 영양소가 포함된 사실상의 완전식품!
일단 가장 중요한 맛. 재난식량은 맛이 없다. 맛은 주관적인 요소고 사람마다 그 평가가 다를 수 있다. 근데 일단 직접 이틀간 먹었던 기자한테는 확실히 맛이 ‘너무’ 없었다.
“이게 재난식량이라는건데…”로 시작되는 설명과 함께 동료 기자 몇 명에게 작은 조각을 나눠줘 봤다. 대부분 “맛이 없다”내지는 “이걸 이틀을 먹는다고?”라고 물었다.
간혹 “생각보다 괜찮은데?”나 “왜? 비스킷처럼 맛있는데?”라는 반응이 없었던 건 아닌데, 아마 이들도 이틀간 이 것만 먹인다면 평가가 바뀔 여지는 충분하다고 본다. 일례로 기자가 “맛있으면 이틀 동안 이거만 먹을 수 있겠어요?”라고 물었을 때 “그럼!”이라고 자신 있게 답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김○○ 미술기자는 실수로 줬던 걸 까먹고 기자가 재난식량을 두 번 권하자, “아니! 저는 아까 줬잖아요!!”라며 격앙된 반응을 보이기까지 했다.
주관적인 평임을 감안하고 보다 자세히 맛을 묘사해보자면 우선 겉에서 ‘두부향’이 난다. 다소 달콤한 향인데… 좀 불쾌하게 달콤한 향이다. 단맛을 꼭 설탕이아니라 사카린으로 낸 듯한 느낌이 난다. 수분, 유분이 전혀 없는 극한까지 건조하게 제작한 식품.
살짝 눌러보니 조각조각 잘 부서진다. 흡사 칼로리밸런스를 부술 때의 느낌과 비슷한 강도와 질감이다. 근데 부수면 정말 숱하게 많은 가루가 떨어진다. 어차피 이 식품은 재난식량이라, 가루가 부서져 떨어지는게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긴 하다.
입에 넣고 씹어도 두부와 비슷한 향이 나는데 이 역시 어딘가 부자연스러워 불쾌한 느낌이다. 식감은 굳었던 모래덩어리가 입 속에서 뱅글뱅글 흩날리는 느낌이다.
본격적으로 체험에 돌입하자, 호기심을 보였던 동료들은 모두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이젠 기자 혼자 남아 이틀을 버티는 것만 남았다.
실험 시작 전에는 당차게 “점심 먹을 때도 따라 갈게요! 맛있는 걸 눈앞에 두고 버텨야 진짜 체험이죠!”라고 했지만, 체험 첫 날 아침 10시가 되기 전에 이 당찬 선언은 바로 철회했다. 맛있는 음식을 눈앞에 두고 혼자 이상한 음식을 푸석푸석 씹어먹는 일을 도저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먹는 둥 마는 둥 코를 막고 블럭 4개 정도를 삼키며 저녁에 집에 가기 만을 기다렸다. 판매처에서는 따뜻한 물에 넣어 죽 형태로 만들어 먹어도 된다고 설명했다. '사람 먹으라고 만든게 이런 맛일리가 없다… 죽으로 만들어 먹는게 정석일 거다…' 체험을 진행하며 기자는 소망과 현실을 혼동하고 있었다.
퇴근 후 ‘어떻게 재난 상황에 따뜻한 물로 죽을 만들어 먹으라는걸까’라는 생각은 했지만, 일단 조금이라도 더 맛있을까 싶어 죽으로 만들어 봤다.
근데 당연히 이것도 맛없었다. 그냥 먹으면 안 그래도 밋밋한 맛, 불쾌한 향이 더욱 밋밋하고 불쾌해져서 삼키는 것 자체가 곤란한 지경이 된다. 한 블럭 먹어보고는 다시는 죽으로 만들지 않았다.
체험 이틀째인 9일. 이미 맛있게 이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는 건 포기했다. 실은 식수와 재난식량만을 섭취해야 한다는 체험의 규칙상 '그냥 먹기', '죽 먹기' 이외에 다른 선택지라는게 따로 없기도 했다.
한 블럭을 8조각으로 나눠 천천히 먹어봤다. 조금씩 먹으니 덜 역해서 좋긴 했지만, 오히려 먹는 시간이 더 길어져 불쾌감의 길이도 길어졌다. 그 다음엔 4조각으로 분할해 먹었더니 섭취 시간이 짧아져 좋았지만, 급하게 삼키느라(입에 오래 물고 있기 싫었다) 목에 걸려 헛구역질을 했다. '4조각으로 분할해 꼭꼭 씹어먹기'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급기야 이튿날 마지막에는 코를 막고 물을 입에 넣은 채 녹여서 먹어 봤다. 향을 맡을 수 없어 좋았지만, 느낌은 더 이상했다. 비스킷처럼 단단했던 재난식량이 물과 섞이면 마치 머드축제의 진흙같이 입 속에 퍼진다. 그 다음 생수를 삼켰다. 그나마 목에 걸리지도 않고, 향도 느껴지지 않는 방법이라 끝날 때까지 이 방법으로만 재난식량을 삼켰다.
◇몸은 물론, 마음까지 변한다…‘현재의 절망이 미래의 희망으로’
비록 이틀간의 짧은 체험이지만, 그 사이 발생할 수 있는 신체적 변화도 관찰해봤다.
가장 정량적인 측정이 가능한 체중 변화부터 살펴보자. 실험을 하기 직전에 측정한 체중은 69.6kg이었다. 실험 종료 직후 측정한 체중은 68.4kg. 이틀동안 1.2kg가 빠졌다.
마치 다이어트에 도움이 되는 음식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틀간 거의 굶다시피해서 1.2kg가 빠진 것이다. 재난식량 1팩(2300kcal)이 하루치인 만큼, 계획대로라면 이틀 동안 2팩을 먹어야 했다. 하지만, 기자는 이틀 동안 1팩을 먹는 데 그쳤다. 특별히 ‘재난상황을 가정해 아껴먹자’ 같은 생각을 한 건 아니다. 먹어보면 알겠지만, 재난식량의 맛은 자연스럽게 아껴먹게 되는 맛이다.
하지만, 소화는 매우 원활하게 만드는 음식인 것 같다. 기자는 평소에 만성적인 위장병을 앓고 있다. 약 30년간 살아오면서 크고 작은 복통을 앓은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많다. 무엇이든 먹으면 꼭 30분 안에 화장실을 가야할 만큼, 평균적인 수준보다 한참 떨어지는 수준의 소화 기능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난식량을 먹으면서는 최소한 소화기관에서 문제가 생긴 적은 없었다. 평소처럼 급하게 화장실을 찾은 일은 이틀간 한 번도 없었으며 대변은, 음… 배변활동까지 자세히 묘사하기는 곤란하지만, 일반적으로 ‘건강한 ○’이라고 할 만한 모습이었다고만 해두자.
심리적 변화도 있다. 우선 의욕과 기운이 뚝 떨어진다. 기본적으로는 섭취한 칼로리의 양이 평소의 절반으로 줄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맛있는 것을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훨씬 크다.
원래 기자는 먹을 것에 별 관심이 없다. 극히 나쁜 위장 상태가 시사하듯, 끼니도 귀찮으면 아무렇게나 굶을 때가 많고, 번거롭더라도 먹어야 할 땐 피자빵 정도의 소량의 식사로 먹는 둥 마는 둥 때운다. 그런데 ‘내가 귀찮아서 안 먹는 것’과 ‘먹을 수 없어서 못 먹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자꾸 이것저것 맛있는 음식을 떠올리면서 드는 생각들이라곤 “내가 대체 이런 짓을 왜 한다고 했을까”, “아무 것도 안하고 누워만 있고 싶다”등의 의욕을 저하시키는 것들 뿐이었다. 근데 정말 특이했던 건 의욕과 기운이 떨어지는 정도가 일상생활을 해칠 정도는 아니라는 점이다. 투덜투덜…중얼중얼…하면서도 이동하는데, 짐을 드는데, 일을 하는 데 있어 지장을 주진 않았다. 이 식품의 진가는 사실 여기에 있다.
◇맛이 없기 때문에 '지상 최고의 재난식량'
기자는 재난식량을 먹으며 지낸 이틀이 입사 이후 해봤던 어떤 취재보다도 끔찍했다. 당연히 제1의 원인은 맛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엔 구토까지 할 뻔했던 이 끔찍한 재난식량을 먹으면 먹을수록 참으로 잘 만든 '재난용 비상식량'이라는 생각을 했다.
애초에 이 재난식량은 맛있으라고 만든 식품이 아니다. 지진, 방사능 낙진, 전쟁 등의 절체절명의 순간에 최대한 오래 생존하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제품이다. 식감, 보관편의, 유통기한은 물론이고 맛까지도 철저히 ‘장기 생존에 유리하게 만들어졌는가’라는 하나의 관점에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때문에 이 식품의 맛없음은 결코 저평가 받아선 안 되는 훌륭한 장점이다. 재난 상황의 가장 큰 공포는 ‘언제 구조될 지 알 수 없다’는 데 있는 만큼, 식량과 식수를 아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이 재난식량이 초코바라던가 치즈케이크처럼 너무 맛있는 음식이었다면, 안 그래도 먹는 것 이외에 특별한 유희를 찾기 힘든 재난 상황에선 게눈 감추듯 먹어치울 공산이 크다. 아끼더라도 많은 인내를 견뎌내야만 할 것이다. 이 재난식량은 별다른 노력 없이도 ‘맛이 없어서 자연히 아껴진다’는 굉장한 장점이 있다.
맛없음 뿐 아니라 의욕 저하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다. 이 식품은 오래 섭취하면 현재의 생에 대한 의욕을 매우 떨어뜨리면서도, 미래의 생에 대한 의지를 매우 북돋우는 대단히 특이한 심리 상태를 겪게 된다.
우선 ‘현재의 생에 대한 의욕’. 앞서 말했다시피 이걸 먹으면 별로 하고 싶은 게 없어진다. 물에 녹으면 진흙처럼 묽어져서 포만감이 없어지는 식품. 고기나 밥을 먹었을 때의 든든함이 없다보니 먹어도 먹은 것 같지가 않아 활기가 사라져버린다.
그런데 먹고 싶은 것들이 자꾸 생각나면서, 재난식량을 그만 먹게될 날을 바라는 의지가 굉장히 강해진다. 삼겹살, 치킨, 라면 같은 음식을 마음껏 먹고 싶은 마음에, 미래의 생에 대한 의지가 불타는 것이다.
재난 상황에서는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최대한 아끼는 게 좋다. 먹으면 먹을수록 나중에 구조되면 먹게 될 맛있는 음식을 생각하며, 당장에 무엇인가 하고 싶은 기운이 쭉 빠져버리는 이 식품의 특징은 장점이 아닐 수가 없다. 여기에 영양 구성이 완벽해 생활에 필요한 근력이 온전히 유지된다는 점은 덤이다.
물론 ‘생존 가능성’이라는 단일 요소로만 평가했을 때의 단점도 존재한다. 보존의 용이성 때문에 수분, 유분이 전혀 없다시피 한 건조한 블럭이라 먹을 때마다 목이 메인다는 사실이다.
이는 다시 말해 재난 상황에서 더 많은 식수를 소모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근데, 재난 상황시 식수가 모자라면 원래가 오래 생존할 수 없다. 달리 생각하면 ‘식수만 충분하다면 단일 식품만으로 살아남을 수 있게 해주는 식품’이라는 관점으로도 볼 수 있겠다.
체험 종료 시점인 9일 자정이 지나자마자 체중을 재고, 바로 라면 물을 올렸다. 물론, 재난식량을 먹으며 잠시 사라졌던 복통과 설사… 그리고 기자의 패시브 스킬인 만성 위장병은 다음날 즉시 찾아왔다. 하지만 상관없다. 소화 기능이야 원래 약했던 거고, 뭐가 됐든 더이상 ‘이런 음식’을 먹으며 살 수는 없었다.
이번 체험으로 재난식량만 삼시세끼 꼬박꼬박 챙겨 먹는다면, 완벽한 영양균형과 함께 속이 편안한 소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기자는 알게 됐다. 하지만, 평생 크고 작은 복통에 시달릴 지라도 먹고 싶은 거 마음껏 먹는 삶이 훨씬 행복할 거라고 확신한다. 재난식량 체험이 가져다 준 ‘소확행’이다.
문득 부모님이 시골집에서 기르는 진돗개가 사료만 먹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다음에 내려가면 몰래 고기라도 잔뜩 먹여줘야겠다.